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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사키] We are

Sandel 2015. 11. 29. 15:45
수평선 너머로 울렁이는 노을이 종막에 다다를 때, 슬슬 밤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드넓은 천지를 올려다봤다. 노을 탓인지, 주홍빛 팔레트로 물들어가나 싶더니 어느덧 노을이 잠드니 아름답던 저 풍경마저 누군가 그 위에 덧칠하듯 푸르게, 푸르게 물들어져 갔다. 밤이다. 아까만 해도 땅을 서성이던 개미들도 배경을 인식하고 각자의 고향으로 몸을 숨기고, 나는. 나는 그저 그들을 바라보며 완전히 저문 노을과 떠오르는 달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돌아갈 곳, 저 무한한 개미들은 각자의 고향이 있는데, 나는. …나는? 글쎄, 잘 모르겠다. 내게 고향이 있었던가, 있더라 하더라도 먼 훗날에 모조리 지워버린 걸로 기억한다. 이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떠오르는 게 없어. 있다고 해도 전부 옛적 이야기들 뿐.

"그러다 감기걸린다? 덴시치."

모두 옛적 이야기들 뿐. 변화되는 상황이 그닥 무섭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뒤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누군가 내 뒤에 대창을 겨누고 있다는 말이다. 느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이들 중 대창을 사용하는 녀석이란, 전 졸업생 시오에 몬지로 선배가 아닌 되려 나와 동급생인, 결코 나타날 수 없는 존재.

"여긴 대체 무슨 일이래?"

닌교 사키치. 나는 그를 확실히 알아차린다. 한 때 나와 같은 반이었지, 나와 같은 실력자였지, 나와 같은… 아아. 모조리 공통점이다. 차이점이라곤 없다. 어긋나게 말하려 해도 첫말은 무조건 '나와,' 라던가, '한때' 라던가. 너와 나의 차이점이라곤,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네가 증오스럽다. 그동안 소식조차 없던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것에, 그럴바에 차라리 영영 사라져버리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네가 증오스럽다. 지금, 내 앞에 나타난 네가 증오스럽다. 닌교 사키치, 나는, 네가.

"네 실력이 보고싶어졌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웃고있음을 나는 자각할 수 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나를 위협하고 있음을 나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터, 사실 나조차 바란 거였을지도 모른다. 점점 고조되는 상황이 우스워 입꼬리를 간질였다. 아아, 지금 웃어봤자 그는 모른다. 이 분노속에 외치는 즐거움을, 바라던 바다. 라 웃고있는 내 모습을 그가 알 필요는 없었다. 그저 즐겨줬으면 한다. 그는 지금 정면을 바라보고 있겠지. 지금 내가 무언가를 조용히 떨어뜨린 건 절대 모르리라.

아, 이 때다.

"사키치, 닌교 사키치."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다. 낮은 읊조림과 함께 펑, 하고 큰 폭발음이 주변을 울렸다. 딱히 그에게 해할 생각은 없었으나, 큰 피해를 입든 말든 내게는 딱히 관심사에 들지 못했다. 이미 내 머릿속을 장악한 사람은 흐릿한 연기 사이 잘도 숨쉬고 있는 '그' 밖에 없으니까. 용케도 피했구나. …괜히 대놓고 떨궜나. 애초에 내가 아닌 보록화시가 좋지 못했던 거다. 그런거다. 나는 무조건 완벽한 타이밍을 잡았으니까.

"이제 슬슬 승자를 가려내야지."

옳다. 옳아, 그의 말에 짧게 탄식을 뱉었다. 맞는 말이기도 함과 동시에 또 지루할 터, 나는 품 속에 가둬놓은 보록화시를 하나 꺼내 들었다. 둥근 달이다. 반듯하면서도, 달처럼 둥글다. …완벽한 보록화시다. 전 졸업생 타치바나 센조 선배에게서 배워온 보록화시 전수가 있었다. 허나 이제 선배의 전수와 비법에서 졸업한 지 오래다. 이제 나만의 방법으로, 나만의 완벽한 방법으로 대창을 고정하듯 바로잡는 그를 억누를 것이다. 분명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리라. 그리 짐작한다.

왜냐면 우리들은,

"이 우월과 완벽의 끝판을!"

'완벽' 에 물든 짐승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