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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마이사ts] 우주를 건너 (上)

Sandel 2015. 12. 3. 19:51
조화로 가득 꾸며진 갈빛 나무문을 열자 그곳에는 나를 놀라게 하는 것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흔한 책방에서나 맡을 수 있는 낡고 허물어진 책 냄새, 아기들이 좋아할 것만 같은 인형이나 소품이라던가, 널부러진 책들로부터 시작해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물품들이 바닥에 엉켜 있었다. 당연히 익숙치는 않았다. 그저 종이 쪼가리만을 믿고 달려왔는데, 굉장한 이벤트가 열리리라 믿고 헐레벌떡 뛰어 도착한 곳이 고작 이런 평범한 오두막이라니. …헌데 뭘까, 막상 느껴지는 신비로움이란. 내 눈앞에 블랙홀이 펼쳐진 듯한 그런. 아아, 빨려들어간다. 내 몸이, 광경이. 저도 모르게 신발을 벗고 멋대로 내부를 구경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수록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오묘한 기분을 느끼고 마는 집이다. 보통 사람이 살 수 없을 법한 숨 막히는 곳.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 곳.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어보았다. 눈 앞에는 한 번도 쓰지 못한 피아노가 놓여져 있다. 낡아빠진 피아노, 먼지로 가득 묻혀진 건반. …대체 이런곳에 누가 사는 걸까, 아무도 없으리라 믿으며 고개를 돌리자 손이 미친듯 떨렸다. 동공마저 제자리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사람이 있다. 사람이 있었다.

베이지색 가디건을 걸친 짧은 숏컷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여자가 중간 사이즈의 곰인형을 끌어안은 채, 주변에 그녀만한 어항 사이즈로 그려진 공간 안에 곤히 자고 있었던 것이였다.

*

여리다. 아름다운 소녀 인형… 아니, 그녀. 저 여자가 내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려나. 누굴까, 그녀는 누굴까. 머리가 새하얀 공백으로 매워져간다. 부시시한 옅은 갈색의 머릿결, 쓸어내리다 끝에도 내려가지 못해 금방 엉켜버릴 것 같은…, 시선을 돌려 그녀가 입은 소녀틱한 복장이 눈을 사로잡았다. 단순히 베이지색 가디건만 걸쳤을 뿐, 사람을 인형으로 바라보는 내 눈이 이상한 걸까. 아무리 손으로 눈을 비벼봐도 인형은 여자 인형. …사람. 사람, 맞지? 아름다운 사람, 인형.  혼란스럽다. 계속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숨이 멎을 것만 같아. 그만큼 그녀는 숨소리마저 죽이고 깊게, 깊은 꿈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조용히 숨을 고르다, 말다, 수십번을 반복하다 그녀에게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제멋대로, 뒤에서 누군가 내 손을 조종한다. 그녀에게 손을 대보라는 듯이, 두렵다. 사실은 두렵다. 헌데 그녀의 볼을 향해 손가락을 톡, 갖다대니… 어라.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

"으응,"

낮은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내가 낸 것이 아닌, 그녀에게서 나온 목소리였다. 아기같은 옹알이를 내뱉더니 그녀가 가늘게 눈을 떴다. 기척을 들킨건지, 그녀에게로 뻗은 손가락을 도로 집어넣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잠든 줄 알았는데, 그런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설마 내가 오기까지를 기다리며 그동안 눈만 감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던가, 아. 그럴일은 없겠지. 제 스스로 고개를 가로저어가며 흔드는 사이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가 일어났다. 눈을 완전히 뜬 그녀가 주변을 의식하더니 고개를 들어 빤히 고개를 젓던 나를 응시했다. 몇 걸음 더 물러나려는 순간 그녀가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 짧은 다리로 타박타박, 내게로 걸어왔다. 다시 물러나려 해도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아. 그녀의 눈. 신비로우면서도 다른 세계에 잠긴 듯한 그녀의 치명적인 눈에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었으리라.

"넌, 누구야?"
"…네?"
"너, 누구냐고."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온 침입자, 라 생각한 건지 그녀가 볼을 살짝 부풀렸다. 허나 그녀의 행동에 관해서는 어째서인지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옷이, 모습이… 여전히 누군가 만들어 놓은 움직이는 조각인형, 아름다운 인형 같아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만히 서로를 응시했다. 이 60초의 길고 짧은 순간마저 여러 상념에 빠져들고 만다. 분명 날 부른 사람은 그녀가 아닐까, 헌데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비몽사몽한 상태로 내게 말을 걸고 있어 그러는 걸까, …그녀를 보자마자 왜 내 심장이 규칙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걸까.

"저, 그, 초대장… 받고 왔는데……."
"응? 무슨 초대장?"

'초대장' 이라는 소리에 그녀는 반응조차 없었다. 되려 내 모습을 이리저리 훑으며 무슨 초대장을 얘기하는건지, 호기심에 두리번거리기만 반복할 뿐. …아, 잘못 들어온건가.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기대' 라는 마지막 불빛이 꺼지지 않게, 그녀가  깨달을 수 있게 주머니에서 초대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내용은 별 거 없었다. 흰 편지봉투에 하트무늬 스티커가 붙여있지, 떼어보아 내용을 읽어보면 빈 종이에 큰 글씨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와 함께 티슈만한 약도가 들어있는 것 밖에.

초대장을 받은 그녀가 조용히 내용물과 함께 약도를 대충 훑고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완벽하게 어긋나버린 상황에 밝게 비췄던 불빛은 대답과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이건 내가 보낸 게 아니야."
"…아, 그렇다면 죄송……."
"랄까, 주소는 여기가 맞아."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는 그녀의 머리에서 금방 물음표라도 튀어나올 듯이 머리카락이 신나게 붕붕 떠오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그녀가 사는 집으로 초대장을 보낸 이는 누구, 도대체 나를 애태우는 그녀는 누구인가. 대략 나이로 봐서는 나보다 어려보이는 10대 초반에 부모님은 맞벌이, 어린 나이기에 문도 잠그는 걸 잊고 기다리다 잠든 건가…. 라 생각하던 찰나 이 생각마저도 그녀가 모조리 산산조각 내고 난 뒤였다.

"일단은… 너, 누나라고 불러."

난 너보다 나이 많은 누님이니까.
너보다 나이 많은 누님이니까.
나이 많은 누님이니까.
나이 많은 누님.
…누님?

그녀의 당돌함에 당황한 지 오래다. 넋을 놓은 채 그녀를 부정하며 고개를 저을 정도로. 심지어 가만히 있던 손조차, 파닥파닥. 아니라며 노를 젓고 있었으리라. 어린 나이라 생각했던 그녀는 햇병아리 성인이라고 한다. 본인 스스로 자신은 미래의 병아리에서 닭이 될 거라며 제 머리를 긁적이며 옅게 볼을 붉혔다. 아아, 귀엽다. 그녀… 아니, 누님은 생각과 달리 이런 스타일이였구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반전에 통수 맞은 기분이다. 그냥 유턴해서 돌아갈까, 생각할 정도로. 허나 무언가가 내 주변을 둘러감싼다. 나를 붙잡는다. 그녀에게서 도망갈 수 없게, 꽉 붙잡는, 그녀만이 모르는 기괴감이 허공을 맴돈다.

"아, 맞다. 네 이름은?"
"…케마, 토메사부로. ...인데,"
"편하게 대해. 편하게, 편하게."

아무리 편하게 대하라 하더라도 그녀는 낯선 사람. 그와 동시에 오묘한 소녀 인형. 또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누님이 지금 내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을까, 이유모를 불안감이 뒤따라왔다. 만일 정말 그런 생각이 그녀에게서 돌고 있다면.

"역시 어색하려나, 그럼 이렇게 불러볼까?"
"에, 어떻… 게요?"
"이사쿠 누나, 라고."

아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있더라 한들 내 스스로 부정하리다. 그녀의 이름은 이사쿠. …성도 알려달라 하고 싶지만, 조금 무리일까 싶다. 예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아직 그녀에 대해 알고싶은 게 산더미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말이 나오지도 않을 터이니.

"이사쿠, 누나..-?"
"응, 응! 그렇게!"
"…응, 이사쿠 누나."

동서남북, 이곳저곳 신비로운 집과 신비로운 그녀에게서 흘러넘치는 행복… '행복' 이란 단어가 웃음으로 소화되어 내게로 전해지고 있었으니까. 단지 그것 뿐이다. 행복하다. 이렇게 행복했던 건 처음이라 느낀 그 때였다.

"응, 응! 만나서 반가워!"

토메사부로.

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준 그 때, 그녀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춰지나 싶더니 조금씩 누군가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처럼. 그녀와 정체모를 이의 모습이 내 눈에 겹쳐지고 있던 어느 날 정적의 오후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