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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무긴] 공백

Sandel 2015. 12. 19. 19:40
무엇도 없는 새하얀 공간, 가만히 있자니 금방이라도 다리가 근질근질거렸다. 뭣도 모르고 그저 움직이는 게 다인 내 몸에게 가만히 있으라 명령해도 사고가 움직이면 게임 오버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공백이란 글자에 흰 배경을 채워놓은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조금은, 정신이 혼미해진 듯 했다.
내가 실감하고 있는 이것은 꿈인가, 환상인가. 계속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가 저려온다거나, 아프다는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도 않더라. 그 대신 당장 벗어나오고 싶단 생각이 귀를, 내 머리에서 빠져나와 허공을 돌고 돌았다. 계속 이 곳에 있다가는 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단 생각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대체 여기는 어디, 조금만 더 이런 곳에서 숨을 쉬다가는 내가 누군지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사무라이 형씨."

혼잡함을 끌어안은 내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들이 아침을 지저귀듯 나긋하게 들려왔다. 이 호칭도 그렇고, 소리도 그렇고. 낯익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허나 들려온 건 사무라이 형씨, 그거 하나 뿐. 그의 한 마디밖에 더 들려오는 건 없었다. 그리우면서도 정겨운 목소리. 그것이 바로 그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애당초 그의 정보도 모르는 내가 이런 곳에서 적의 이름을 부른다니. 자존심이 배로 깎이고도 남을 일이리라.

"대답해줘, 사무라이 형씨."

또 들려왔다. 한 번 더 들으니 정겹다, 라던가 그립다, 라던가. 상념들은 모두 사라졌다. 왜, 어째서? 그것은 내가 존재하는 곳이 하필 이런 곳이기 때문이었다. 새하얀 공백, 블랙홀처럼 나의 존재와 그의 목소리를 빨아들인다.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형상이 나온다 해도 나는 그에게 달려갈 수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내 몸조차, 존재조차 한 곳에 멈춘 기분이 들어버린 것이다.

"보고싶어, 형씨."

진정할 수 없었다. 희망고문을 맛보는 끔찍한 느낌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빠져 그를 앓는다니. 하필 영원히 등을 돌려야 할 녀석을 그리워한다거나, 보고싶다거나. 애당초 난 모르는 곳에서 이런 시츄에이션을 벌이고 있는 건지. 미칠 것만 같았다. 지금 벌여지는 상황에, 그의 목소리에,  흐르던 사고가 곧장 멈출 것 같아 불안을 느꼈다. 절대 도와달라 해도 여기에 올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다. 나 혼자의 시련이리라 믿는다. 내가 버텨야 할 시련이리라 굳게 믿는다.

"어디있어? 형씨, 지금 대체 어디있는 거야?"

허나 그의 다급함이 담겨진 한 마디에,

"나도 보고싶어진다고…, 멍청한 자식아."

믿는 게 무엇인지, 신뢰마저도 다 잊어버릴 듯한 공포감에 시달려 마저 눈에서 이슬비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