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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마이사] 위선자

Sandel 2015. 12. 21. 16:27

 우리들은 졸업했다. 졸업을 대신해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과의 눈물을 서로 교환했고, 우리. 보건위원회 몫을 다해 열심히 나아가달라고, 자신들도 동경하는 누군가를 따라 성장해 나아가겠다고 약속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아이들은 그 ‘누군가’를 지칭한 이는 다름 아닌 나, 나 자신이었다. 인술학원에게 안녕을 고하는, 늘 익숙한 출입문을 열기 전 내가 속해 있던 위원회. 즉, 내 지휘없이 자유로이 움직이며 친목을 다스리는 보건위 전 일동이 내게 말하기를,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몇 년 후 우리들이 강해졌을 무렵 당신에게 도전장을 내미리라고. …결코 전투를 뜻하는 도전장이 아니리라는 것을 안다. 순결로 가꾼 어린 꽃들이, 설마. 그럴 리 없다고 믿는다. 그렇게 내 앞에 환한 미래를 기대하며 아이들을 끌어안을 때가, 그 날이 나의 처음을 맞이하는 발판이기도 했다.

 졸업 이후엔 무슨 변화라도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나 모두들 각자 제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경사스런 일이다. 직접 찾아가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은 갈수록 솟아나는데, 정작 그럴 수 없다는 게 허점이었다. 왜냐면,

  “앞으로 ‘전장의’ 로서 잘 부탁하네.”

  옆에서 프로들의 보조를 도맡기만 하던 내가 난생 처음으로 성주에게 ‘공식’으로 전장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허나 이 소식을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그저 ‘보조 전장의’다. 그것 뿐이기에 당당히 알릴 수 없었던 거다.

 전에 담당했던 전장의는 불의한 사고로 지금 성주의 곁을 먼저 떠났다고 했다. 아니, 성주가 아니라 지켜왔던 전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성주는 그를 무척이나 아꼈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몫을 더해 내게 부담을 안기고서는 전장에 휙, 군사병과 함께 내던져졌다. 전장으로 가던 도중에는 공교롭게도 별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인술학원에 있었을 때만 해도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진다거나, 내 등 뒤로 바위가 굴러온다거나 하였거늘. 오늘은 운이 따라주나보다. 그 대신 주변에서 간간히 비명 소리가 들리고는 했다. …아무렴 뭐 어때, 낮게 웃으며 기운차게 전장에 발을 내밀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선 전장은 황폐한 토지밖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보아하니 이 토지를 소유할 목적으로 허무한 싸움, 전쟁을 시작하려나보다. 새로운 전장 앞에 부풀어진 기대는커녕 펑, 하고 풍선 터지듯 모든 게 무너지나 했다. 이 상태로 누군가를 치료하느니, 나무기둥에 기대 느긋하게 상황이나 지켜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작을 끊은 전쟁은 전쟁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억지로 짜여진 시나리오, 각본만 짜여진 엉터리 연극을 보는 듯 했다.

  “여기 좀 도와주시오!”

  허나 전장은 전장, 전쟁은 전쟁이었다. 여유롭게 그럴 수 없는 노릇이리라. 여기저기 부상자가 생긴다거나, 쓰러진 병사들이 한 곳에 있을 때 그들을 옮겨 부상을 치료한다. 아니면 그 자리로 움직여 그들의 상태를 확인한다. 아마 전에 있었던 전장의도 자신에게 들이닥친 위기를 외면하다 그리 된 걸지도 모른다. 같은 전장의, 까지는 아니여도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말판을 지탱해주는 대신 병사라는 말을 조금이나마 이끌어주고픈 무력한 말판, 그것이 바로 우리 ‘전장의’들의 사명이었다.

  한 치의 양보라거나 용서 따위라곤 없었다. 방심하면 훅, 가는 게 전쟁이다. 비록 아군을 응원할 수 없다는 게 아쉽다고 한들 나는 나대로, 저들은 저대로 해야 할 임무가 있다. 헌데 나는 뭘까. 새로운 전장, 처음으로 직접 실감하는 전장에 손을 뻗을 수 없을뿐더러 단순히 저만치서 삶을 보살피며 뒤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니. 발이 바쁜 사이에도 나는 그들을, 그들 몰래 살기를 띄워가며 싸우는 그들을 질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하, 수고가 많수다.”

 “네?”

   상황을 지켜보던 도중이었을까, 골골 앓는 부상자들 사이 중년 후반의 남자가 허리 부근에 선혈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털썩, 어느정도 정신을 붙잡은 채 쓰러졌다.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가 의식을 살폈다. 호흡이 가빴다. 출혈이 심한 터라 더 이상 가다가는 그의 호롱불이 점차 빛을 잃어갈 것. 한 시라도 빨리 지혈하지 않으면 이 남자는 죽는다.

 누구로 인해? 나로 인해.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어떤 무리수를 사용해서라도 눈앞에 있는 환자를 치료해야만 한다. 그것이 ‘전장의’의 사명. 끝까지 지켜야만 하는 사명이었으니까.

 급한 마음에 황급히 출혈이 자자한 곳에 거즈를 덮었다. 가능한 출혈을 멈추고, 살려야만 한다. 설령 이 남자가 등을 돌려야 하는 적군일지라도, 아니. 이 남자는 우리의 적군이다. 남자가 쓰러지기 전 그는 내게 살기를 띄웠다. 나는 보았다. 삿갓은 물론이요, 갑옷의 색마저 우리와 정 반대라는 것을. 그렇다. 아무리 적군이라 한들 나는 이 남자를 치료해야 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나는.

  “참 이상한…… 녀석일세.”

 “아직 움직이지 마세요. 지혈이 덜 끝났으니까요.”

 “전장의란 것도, 다 그렇지 뭐.”

   남자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경직되어야 할 손은 오히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말하면 말할수록 남자의 수명이 짧아질까봐? 아니다.

   “헌데 너는 왜 적군도, 아군도, 다… 치료해주는 겐가?”

   아주 잠시, 먼 훗날이 생각났을 뿐이다. 그 때의 어느 누군가가 이 남자와 같은 질문을 해준 적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은 치료에 바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 추억에 잠겨, 죽음이 무서워 나는 지금 다 죽어가는 남자를 놓고 싶지 않을 뿐이다. 죽음이 두려운지는 나조차 감잡을 수 없다. 전 전장의의 보조를 맡았을 적, 그 사람도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애초에 모든 전장의들은 같은 생각으로, 누군가를 치료해야하는 동등한 사명으로 이 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난 그의 질문에 확신이 붙들어간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왜냐면 저는, 전장의니까요.”

   염치없는 내 자신감에 남자는 껄껄, 낮게 웃음 지었다. 세상에는 별 신기한 전장의도 다 있다면서…. 아아, 어느덧 그와의 짧은 헛담을 나누다보니 몰아치는 출혈이 가라앉았다. 그제서야 남자는 어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지팡이로 삼아 땅에 꽂아가며 전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맙다거나, 작별 인사라곤 우리에겐 없었다. 그저 서로가 원하는 걸 이뤘으면 그만이다.

 아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얼른 끝나고 아내와 밥을 먹고 싶다… 라던가, 아주 잠깐이나마 즐거웠다고 생각했던,

  “으악―!!”

  때는 어느 순간 뿌리는 뽑혔다. 완전히 어긋났다. 누군가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아까 말없이 떠난 중년 후반의 남자 목소리였다.

   “아까부터 자꾸 저 놈들이 목발짚고 오나 했더니…,”

   낯선 목소리다. 아니, 어디선가 들은 듯한 목소리다. 허나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그의 괴로운 신음을 듣고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후였다.

 그의 넓은 등짝에 무언가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것이 검이 아닌 촌철을 보아하니, 범인이 닌자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한참 전까지만 해도 내게 선명하게 웃어주던 그는 이미 자신의 선혈로 소복하게 덮어진……. 이는 무척 비극이라 불릴 정도로 처참했다. 그는 죽었다. 아무리 다시 지혈한다 해도 그의 숨은 이미 멈추고 난 이후다. 정말로 그는, 죽었다. 아울러 함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마 다수는 아닌 듯 했다.

  “대체 어디에…….”

  일단 느낌이 오는 대로, 자연적인 목소리에 따라 품 안에서 쿠나이를 꺼내 곳곳에 위치해 있는 나무 우거지들 사이로 집어던졌다. 허나 수련을 하도 안 해서 였는지, 던져진 쿠나이는 닌자들로 인해 튕겨나간다거나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나갈 뿐이리라.

 마음은 조급해져만 간다. 나를 둘러싼 가운데 정체모를 겁 없는 닌자들이 빠르게 내 주변을 맴돌고 있다. 예상컨대 이들의 목적은… 아니, 기척을 통해 닌자의 수를 알 수 있었다. 인력으로 불어오는 바람, 조롱하는 듯한 날쌘 다리로 확연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까부터 속도를 늦추는 그들, 아닌 그는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 사람은 이미 정당방위를 빠져나온 어딘가에―.

  “닌자란 건 말이야,”

  목소리는 범위를 새어나와 저 멀리서 소리치듯 그렇게 들려왔다. 허나 이 찰나의 순간에도 목소리와 함께 푸욱, 푹, 흉기를 사람을 찌르는 괴기스런 소리와 섞여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폼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가 있는 쪽으로 급하게 달려갔다. 그의 행방에 빠져 제 자신도 어딘가에 멈춰 해매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뒤늦게야 내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황급히 예상한 쪽으로 달려갔으나, 때는 늦었다.

 내가 있어야만 하는 보금자리에 행성이 떨어졌다. 그동안 틈을 놓을 세라 없이 치료를 반복한 모든 이들에게서 붉은 그것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채 눈길을 구급상자로 옮기자 이미 피와 피가 섞여 더러운 하모니를 자아내던 뒤, 아울러 죽음을 발버둥치는 병사들을 외면한 채 자비란 것도 없이 사이를 가로지르며 모두의 선혈이 묻어있는 촌철을 자신의 어두컴컴한 옷으로 닦아냈다. 이윽고 자신의 일이라는 듯이 남아있는 병사들에게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저 자는 선인지, 악인지는 나조차 눈을 씻고도 짚어낼 수 없었다. 그저 분노에 둘러싸여 세상 모든 것이 악으로 느껴지는 것 밖에는, 더 없었다.

  이 와중에도 병사들은 끊임없이 그에게 죽어갔다. 이유없이 살해를 당한다는 것에 그들은 두꺼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앞에 앓는 몸으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허나 그는 남의 사정따위 알 바 없다듯이 들고 있는 촌철로 사람을 깊게 누른다. 그로 인해 나의 사람, 내가 치료했던 사람들이 죽어간다. 진동해오는 비릿한 냄새에 속이 올라온다. 당장이라도 위액이 쏟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 안타까운 사람들의 비명과 고동, 나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뒤이어 새어나오는 눈물이 그것의 증거였다.

  “제발, 그만……. 그만……,”

  몸이 단단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처음 맛보는 공포에 말조차 저 너머 보록화시의 괴음으로 인해 묻혀 전해지지 않았다. 기꺼이 아슬아슬하게 움직일 수 있는 다리로 그에게 다가갔다. 남아있는 병사라곤 나무기둥에 몸을 맡겨 그에게 구사일생을 애원하는 적군의 병사가 전부였다. 얼마나 공포스러울까. 그 상황을 지켜보는 나도, 이제 곧 희생당해야만 하는 마지막 먹잇감으로 뽑히는 적의 병사는 얼마나 두려울까.

 촌철을 높게 든 그의 팔을 겨우 붙잡았다. 떨림이라곤 보이지 않는 그의 손에 비해 나의 손은 심하게 진동해왔다. 그동안 많은 그 누군가의 희생을 두 눈으로 실감해왔다. 지금의 나는 나의 팔을 그에게서 놓아야만 한다. 원래는 그렇다. 이것이 닌자의 사명이 아닌 위선의 짓이라 해도 오히려 팔을 놓고 안녕을 고하는 것이 적어도 닌자란 말이다.

  “……너는.”

 “저 자를 놓아라. 그 대신 나를 죽여도 괜찮으니까, 제발.”

 “……넌 그저 그렇게, …있어야만 했어.”

  아직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병사에게 고개를 대각선으로 움직였다. 내 사인을 알아차린 병사는 가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말조차 없이 시끄러운 괴성과 함께 전장을 향해 느릿한 속도로 달아났다. 분명 전장으로 도망친 그는 상대측 대장에게 다급하게 상황을 전함과 동시에 일부의 병력이 곧 이 쪽으로 달려올 것이다. 어찌됐든 나도, 붙잡아야 하는 저 자도 모두 이 곳에서 도망쳐야 한다. 허나 당장이라도 달아나야 할 것은 녀석의 한 마디로 인해 모든 사고가 정지됐다.

  “너를, 젠포우지 이사쿠라는 존재를 그저.”

  ――내 곁에 두어야만 했어.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바로 나였다. 흉기는 이미 나를 뚫고 지나갔다. 사고회로가 멈췄다. 심장의 고동마저도, 숨통마저도 그가 먼 훗날에 끊어놓았던 거다. 아아,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 허나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이것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다른 이들은 모르더라도 이제야 나는 그의 목소리, 태도를 보고 정체를 깨닫고 만 것이다. 정신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즈음에 그는 자신이 쓰던 복면을 벗었다.

  “토, 토메…… 사…….”

  새어나오는 땀으로부터 익숙한 푸른 머릿결까지 전부 잊을 수 없었다. 오감을 잊어버릴 것 같아 엎어진 나를 위에서 올려다보는 잔인한 그에게 손을 뻗었다. 허나 그는, 아니. 케마 토메사부로는,

  “이제 영원히 이별이야, 이사쿠.”

  이유없는 배신감을 남긴 채 죽어가는 내 눈 앞에서 말끔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