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스카구 합작] 망가진 한 마디
술래잡기는 끝났다. 한 순간에 끝나버린, 어처구니없는 시츄에이션에 붙잡힌 손목에서의 전율을 곧장이라도 내리치고 싶었다. 그래, 확실히 나는 그에게 붙잡혔다. 몇 번이고 그의 아귀에서 벗어나고픈 시행착오를 끈질기게 겪어봐도 결국 소용 없는 짓이었다. 그에게 한 번 잡히면, 그동안 세워 놓았던 나의 피라미드의 계획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허나 그가 어째서 나를 자신의 곁에 두던지, 왜 나를 붙잡고서 어느한 말도 뱉지 않던지…. 잡히는 즉각, 그대로 끌려가고 만다. 아아, 어디로? ……그가 존재하는 귀병대라는 함선에.
항상 그에게 잡히고 나서, 도중에 그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결코 한 두어번이 아니었다. 그의 눈길에 들어오는 이야기라던가, 쓸데없는 잡담으로 굳게 닫혀있는 입을 억지로 열어보려 안간힘을 써보았다. 여자가 이렇게나 싫증을 내는데도 불구하고 몇 마디도 나눠주지 않냐는 투정마저 그의 앞에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목청 크게 내보기도 했다. 허나 그에게는 모두, …허풍으로 들릴 터였다.
바이올렛의 색이 물들어진, 자주색으로 번져진 머릿결에 어울리나 싶던 그의 하오리를 붙잡았다. 도망치고, 붙잡혔던, 함께 돌아가고 있던 도중에 일어난 나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자신의 하오리가 나로 인해 흘러내리는 걸 눈치채던지, 아니. 나의 감각을 눈치채던지…. 걸음을 멈추고 대담하게 앞길을 가로막았다. 분명 알고있을 터다. 매일 이런 식으로 그를 붙잡고, 자연스레 뱉고 마는 나의 애절한 말이 무엇인지를.
"돌아가게 해줘."
뱀처럼 싸하게 기어오르는 나의 말에 그는 냉기서린 대답으로 굳게 받아치고 만다.
"잠자코 있어라."
이윽고 그가 나의 팔에 주었던 힘을 강하게 누르면, 마저 그의 걸음에 맞춰 조용히 걸어야만 했다. 늘 익숙한 밤거리 스트레이트에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친히 내려주는 그의 억압이란 생동감을 느껴야만 했다.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그래, 항상. 이런 식으로 나날을 새어간 것도 이제 한 달은 훌쩍이나 넘었을 거다. 30일, 처음에는 갑작스런 습격… 아니. 눈이 감겨진 이후로 눈을 뜬 곳이 그의 거처였고, 나의 눈앞에는 그가 창틀에 걸터앉아 뿌연 연기를 넓은 허공애 뱉어내고 있었다. 그래, 그의 앞에서 무슨 독설을 뱉더라도 나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걸 섣불리 자각했을 때가 10일 즈음. …어느덧 이 상황에 익숙해져버린 때가 20일. 아아, ……그렇다면. 지금은? 빠져나올 수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은 커녕 그의 무거운 입을 열어보기에 바쁜 나는, 도대체 무엇?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울고불고 애원해봐도, 결코 나를 헤어낼 그이가 아니다.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는 내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했다. 지옥, 지옥 아닌 지옥을 맛보는 그의 늪에 허우적거린다 하더라도 내면은 되려 장단에 맞춰 춤추는 듯한, 그의 유흥을 띄우기 위해 즐거이 만드는 나는… 그래. 그만의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
"돌아갈래."
"……."
"돌아가고 싶어. 그러니까 이 손 놔라, 해."
그렇기에 더더욱 돌아가고 싶다며 발버둥쳤다. 무능한 손을 움직여서라도, 시도때도 없이 소리쳐도 어쩔 수 없는 도리였다. 그의 등을 건너, 남몰래 타고흐르는 불투명한 이슬비는 이의 증거가 아니던가. 그래, 놓아달라 울부짖으며, 벗어나고픈 나머지 눈물이 벅차오르고 만 거다. 뒤를 잇는 거북한 속사정은 고달픈 흐느낌으로 가녀린 전율을 한 순간에 엎어버렸다. …아아, 참으로 추태스러운 짓이였다.
나의 행위에도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가던 길을 다시 멈추고서는, 뒤돌아 손을 풀어내려 애쓰는 나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어느 달가운 말도 없이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타카스기 신스케라는 한 남자였다.
"놔줘, …놔달란 말야."
"네 녀석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나보군."
순식간이었을까, 그의 눈과 나의 눈이 단번에 마주친 건. 아아, 틈을 노려 손을 낚아챈 그가 뒤돌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있던 것이었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그의 희미한 눈동자는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았다.그에 비해 겁먹은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외면하는 두 동공이 저 너머로 숨으려 달려드는 나는, …수치스럽다. 하물며 그의 내리갈려진 말투로부터 이유 모를 공포를 느끼고 말았다. 잡혀진 손에서 가늘한 진동을 느꼈다. 그와 나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진다는 사실에, 반경조치 미치지 않던… 자츰 입술이 닿아버릴 것만 같은 거리에 이젠 모르겠다며 마지막의 구슬 한 방울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아, 숨결이 들려온다. 그의 숨결이 미세하게나마 내게로 전해져 왔다. 허나 공교롭게도, 입술이 닿아버릴 법한 거리에도 아니하고 그는 나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이윽고 천천히 붙잡았던 손마저도 과감하게 내려놓았다. ……왜, 어째서? 초반에만 해도 깊게 파고 들어간 해방이란 상념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러한 행동을 취한 그의 행동에 의문을 가질 뿐. …그것 뿐이었다.
오묘한 기분을 끌어 안고서 가벼운 실눈으로 시작해, 완전히 눈을 떠보자 나의 앞에 존재하던 그는 나를 제쳐놓고 그대로 정면을 향해 좁디 좁은 걸음을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추어진 그의 정면은 이제 영영 작별이던가. …아니, 어리석은 본능을 따르렀다. 죽어있던 발이 제멋대로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간다. 어딜 가냐고, 이제 돌아가도 되냐며, 허울을 뱉으며 말과 달리 좁은 손을 넓게 뻗어본다. 나의 걸음은 그의 걸음을 결코 꽃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점점 멀어져가는 뒷모습에 어둑한 공기에 섞인 한기가 허공을 맴돌았다. 싸늘한 정적을 뚫고 겨우 그를 붙잡을 수 있다며 그리 다짐했거늘. 이별을 향해 발을 들이던 그의 옷깃을 다시 한 번 붙잡고 당길 수 있다며 그리 생각했거늘….
"사랑했었다."
그를 붙잡고서, 입을 열었던 진심어린 그의 한 마디에 모든 걸 내려놓았다. 끝내 붙잡았던 보랏빛 하오리의 끝부분을, 역으로 흐르고 흐르던 상황을, ……마지막으로 내리쏟던 달빛 사이로 흘러 내리던 그의 눈물을. 전부, 전부, 모두 다 내려놓았다.
나는 보았다. 나보다 훌쩍 넘어서는 그의 키, 얼굴을 바라보아야만 했기에 하염없이 망설이던 고개를 당당히 들어올렸다. 허나 걸음을 멈추고 드넓은 허공을 올려보았던 그의 얼굴은, 볼을 타고 내리 흐르는 그의 투명한 방울 한 조각은 절대 잊을리야 잊을 수 없었다. 주마등처럼 폭포수가 내리타듯 흘러온 처음의 이야기부터, 바야흐로 거슬러 올라왔던… 아아. 분명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허나 달빛 아래서 비춰지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아니. 그이와 내가 함께 자연스런 스포트라이트를 받들이는 영화의 주연처럼…. 감정이 복받칠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그렇기에.
나도 그에게 무언가를 전해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응, 나도."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사랑했었다, 해."
함께 존재하던 시간 속에서, 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애써 피하고만 있던 사실을 마지막으로 그에게 애처롭게 토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