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TALE] 심판의 시간 (스포주의)
침묵의 시간이 벽을 지새운다. 결국 그 벽은 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뒤돌았을 무렵에 너는 또다시 나의 앞에 얼굴을 드러낸다. 인간이 참 괴기스럽다는 증거의 날카로운 흉기를 들고, 이윽고 다가오는 너의 공격을 사뿐히 외면했다. 아이 주제에 둔기를 휘두르는 실력이라곤, …역시 아이는 아이인가보다.
몸에서부터 뿜어나는 너의 망설임은 감히 받아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했다. 당연해야만 했다. 피하면 피할수록, 점차 달아오르는 너의 경박함이 너무나도 역겨워서. 지금 당장 너를 죽이고, 또 죽여도 모자랄 법이라서. 헌데 내게 맺어보는 죽음에도 아니하고, 너는…. 아니, '그녀'는 항상 뒤에서부터 모습을 보인다. 무감각한 표정 사이로 흐려지게 나타나는, ……괴물의 웃음을 이어 다시 한 번 더, 너는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지금 너의 안 속 깊이 숨겨놓은 어떠한 정체를 끝까지 보이지 않은 채로.
아아, 그래.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지.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을 터지. 너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덤벼드는 걸까. 아니면, '우리'와 다른 엔딩을 원하는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너에 대해 알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 나는 도무지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짜릿한 경험을 겹친 소름이 뼈를 타고 오르기만을 반복했다. 이는 결코 '너'라는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을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백 번의 패배를 맞이한 너에게, 나의 발은 본능적으로 멀리 떨어진 너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걸음을 멈춘 곳은, 널부러진 채 숨을 헐떡이며 고요히 눈을 감은 너의 앞이었다. 그런 상황에도 뱉었던 나의 이기적인 말이라곤,
"그만 포기하는 게 어때?"
능청스러운 이야기였다. 없던 웃음까지 보이며 참된 위선을 드러내면서까지 너를 깔보았다. 아아, 이젠 끝이다. 너의 죽음을 최종으로 끝마치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너는 끝내지 않았다. 죽는 후에도 몇 번이고 내 앞에 나타나선, 쉬운 싸움을 벌이고 만다. 너와 나의 싸움에는 끝이 없엇다. 만일 있더라면, 내가 죽어버릴 때이겠지.
…아아, 참으로 아름다운 날이다.
수많은 뼛속을 뚫고 깊이 파고들던 너는 아직까지도 가늘게, 옅게나마 호흡을 되찾고 있었다. 내가 너를 고의적으로 살려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너는 나의 질문에 일일히 대답해야만 한다고, 입을 열어야만 한다고, 그리 여겼다. 허나 성의없는 질문이라 느끼던지, 너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숨고르기를 연달아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래, 아직 대답하기는 힘들겠지. …얼어죽을 농담은 여기서 작별이다. 대답할 수 없다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죽여서라도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설령 너의 '의지'를 갈기갈기 찢어서라도 나는, ……영원히 너를 지옥으로 밀어붙여야만 했다.
나는 너의 심장을 찌르고, 결말은 그러하듯이 너는 그 자리에서 흔적없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애초에 보일리야 보일 수 없었던 투명한 수증기처럼. 제 자리로 돌아서기 전에 너는 또다시 저만치서 어린 흔적을 드러냈다.
"벌써부터 자세를 취한다는 게 웃겨."
"……."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던져볼까?"
너는 무작정 내게로 달려들었다. 언제나 고정된 무기를 손에 쥐고, 여태까지 안 보이던 살기를 붙잡으며 위태로운 윤곽을 자아낸다. 너는 나를 공격하고, 깃털처럼 가벼운 공격을 자유롭게 피하고 만다. 허나 나의 반격에는, 왜, 어째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지, ……피한다 하더라도 어째서 너의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던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너를 죽일 때까지 받아들일 수 없을 터다.
"왜 '그들'을 죽였어?"
무방비하게 움직이던 너의 손을 단숨에 낚아챘다. 아아, 손에서부터 너의 체온을 느낀다. 따스한 온도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칼날의 충동이 우뚝 솟아오른다. 너는 아무런 감정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지긋이 눈을 감고, 나의 움직임을 파악해 무작정 제 몸을 둘러싸기 그지없었다. 그런 너와 달리 나는 너를 폐롭힌다. 있는 힘껏 너를 뭉개고 만다. 나 홀로, 극악무도한 '괴물'로 취급당하는 건, 너와 내가 싸우고 있기 때문일까. 갑작스레 휑한 눈동자에서 타고 흐르는 이런 추태를 너의 앞에서 보이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 '괴물'인 나는 너의 앞에서 눈물 따위를 흘리고 있는 거겠지.
왜, 왜? 어째서 '그들'을 죽인 거야? 죄없는 '그들'을 죽인 이유는 뭐야? '그들'을 죽여놓고 왜, 너는……, 너는…….
나를 베끼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슬을 뿜어내는 이유가 뭐야?
너는 결코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님임을 알고 있다. 이 상태로 너는 나를 죽일 수 있을 터다. 너라면 분명 마지막, '우리'들의 엔딩을 앗아갈 수 있을 터다. 헌데 그렇게, 그렇게. 부정의 의미를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붙잡고 있던 자잘한 손의 떨림을 함께 느낀다. 고통을 배반하듯이, 그것이 무서워 발버둥치는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난 결코 정해진 시나리오를 깨부술 수 없었다. 아니, 너와 나는 언제까지고 신이 내려주는 심판을 따라야만 할 것이다.
그래, 애초부터 난 너가 너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상했기에.
"죽어──."
내가 생각하던 너는 이미 이 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