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히지] 정말로 사랑한다면
많이 야위었네.
하나뿐인 나의 반 쪽. 여전히 변함없는 그이다. 하현달을 그리우는 가르마, 아아. 어울리지도 않아. V자 앞머리가 아니면 너는 네가 아닐 터인데. …헌데 어쩔 수 없는 걸, 시간이 이리 잔혹하게 흘렀는 걸. 오랜 시간 끝에 그와 마주했거늘, 완벽하다 싶은 그에 비해 썩어 문드러진 기계처럼 가만히 앉아 일어날 수도 없는 나를 보아하니 그저 한심하다 여기고 만다. 너무나도 반가운 마지막 손님인데도, 나는 일어설 수 없었다. 고갤 숙여 동공을 으쓱이는 그의 얼굴을 피하는 수밖에. 미안하다는 감정을 바닥에 묶어두고, 보고팠던 너를 향한 반가움마저 앞으로 흐를 무언가에 깊이 심어 놓는다. 그러고선, 외친다.
흐르지 마라, 흐르지 말아줘. 나의 눈물아─.
단 둘이 남겨져 있는 장소, 아니. 고독을 끌어안던 나의 장소에 그가 발을 들였다. 아무도 모를 법한, 그런 줄로만 알고 있던 곳에 찾아온 그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아래로. 나의 이름을 부르며 다급히 달려왔다. 분명 어딘가에 내가 있을 거라 생각 했겠지, …아아, 그래. 그랬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내려온 너는 나의 앞에 걸음을 놓았다. 나를 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기, …긴토…키?"
대신, 작게나마 나의 이름을 되풀이하며 둔한 놈처럼 말을 버벅일 뿐. 어찌나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던 건지, 고상한 손을 진동하면서까지 나의 이름을 반복하여 부른다. 애설픈 상황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옅게 들어올렸다. …귀엽다, 귀여워. ……너무나도 그리웠기에, 부정을 감추기 위해 생각을 헛돌리고 말았다. 상념을 고이 접어 날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너는 내 쪽으로 바삐 걸어오는 모습이 비춰진다. 멀리서부터 가까이, 걸어온다. 그가 온다. 그가 오고 있다. …아니, 아니야. 절대,
"오지마."
싸늘하디 싸늘한 한 마디에 그는 걸음을 멈췄다. 표정이 훤히 드러났다. 왜, 왜? 뻔한 표정. 뻔한 동작의 그가 흐려진다. 허나 지독하게 쓰던 정신을 쏟아붓더니, 그제서야 네가 보였다. 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그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우러나오는 모든 감정을 숨긴, 반갑다는 인사를 전해야만 했다. 그토록 보고팠던 사람,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추억 속에 너와 나를 볼 때마다 너를 떠올린다. 가상의 너를 떠올린다. 한참 그리 떠올리다 현실에 눈을 떠보니, 그는 나의 앞에 힘없이 주정앉아 감춰왔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를 만나기 위해 존재했던 가상의 그는, 분명 나를 떠올리며 점잖게 웃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전처럼 나를 툭툭 건드리며 시비를 틀어내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그 반대다. 역으로 벌어진 현실에, 머릿속으로 그려내던 가짜의 그이를 지워버렸다. 지우는 대신, 낯뜨거운 액체가 나의 볼을 타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울지 않기로 다짐했거늘, 참으로 나는 네가 몹시도 그리웠나보다.
"어이, 히지가타,"
"……."
"난 아직 안 죽었어."
"…알아."
알면서도 하염없이 눈물만을 들이붓는 그가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어느샌가 눈물을 그친 채 웃고있는 내 자신도 있었다. 그래, 나와 너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사랑하면 닮는다고, 어디선가 들은 말을 기억하고 있음에도 아니하고 정말, 정말로. 또다른 차원에 갇혀진 너와 나는 서로를 빤히 바라본다. 가로막은 벽을 짚고서 너는 울고, 나는 웃는다. 그래, …우리들은 이렇다. 늘 이런 식으로 지내며, 어떤 충고도 없이 평범한 '연인'으로써 함께 지내오고 있었을 터다. 옳지 않은 구석은 내 쪽이 모두 차지했다. 아무런 통보없이 사라지고, 너의 이름을 외치며 그리워했던 나의 형편없는 꼴. 이 사실을 그가 안다면 정신없이 비웃겠지. 한심하다며 손가락질하겠지. …아아, 모순적인 사람이다. 사카타 긴토키라는 존재는.
뒤늦게서야 실컷 자학하고선 다시 만난 그에게 입을 연다. 적어도 나에게 쌓고 쌓았던 분노의 등을 일그러뜨리기 위해, 적어도 쌓여온 한을 대신해 네가 나를 완벽하게 죽여야 하기 위해.
"그렇다면 너와 나,"
"……긴토키?"
"이제 그만할까?"
고개를 들고있던 힘이 사라져간다. 그나마 희미하게 보였던 너의 모습조차 뿌옇게, 안개처럼 뿌옇게 지워진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 이젠 영원히 볼 수 없다. 그런 생각에, 그것이 싫어서, 애석히 발버둥쳤다. 고요한 발버둥을 치면서까지 너의 이름을 부른다. 입 밖으로 뱉지 못했던 히지가타 토시로. 너의 이름을 속으로나마 외쳐본다. 닿을리야 닿을 수 없다. 알고 있었다. 돌이키기에는 한 발 늦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긴토키───!!!"
"미안해, 사랑……했, 었다."
─히지가타. 마지막으로 흘린 쓰라린 눈물을 끝으로 너를 놓았다. 아아, 오늘만큼은 지독히 더럽고도 아름다웠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