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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무긴] 거짓말쟁이의 세계

Sandel 2016. 4. 23. 22:15

 






  꿈을 꾸었다. 아니, 꿈을 꾸고 있다. 아무리 제 볼을 세게 꼬집어도, 고개를 이리저리 좌우로 흔들어봐도 나는 이 환상(꿈)에서 결코 깨어날 수 없다는 걸 자각했다. 비몽사몽한 정신을 식빵 자르듯 떨쳐낸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곳, 저 곳 둘러보는 곳마다 고개를 올리다보면 멋없는 회색, 아니. 회색빛 배경 위로 이리저리 그어져 있는 허연 금이 눈에 띄었다. 글쎄, 이 환경을 어찌 설명할까. …아아, 그래. 회색 바탕을 가로지르는 흰 틈. 넓디 넓은 벌집의 유리조각이라 칭해도 과언은 아닐 터다. 그런 곳에 걸맞지도 않던 내가 서 있었다. 망연히 서서, 흐릿한 눈동자를 굴려가며 의식을 가다듬을 뿐. 이런 곳에 갇혀진다고 해서 분이 치밀어오르는 건 아니였다. 그렇다고 해서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던. 

  …단지 꿈에서 깨어나고픈 생각에 벙져있는 몸을 움직여보았다. 제 스스로를 과감히 내리쳤으면 절로 깨어날 것을, 설마 가위라던가. …잘 모르겠다. 허나 주변을 의식하고, 제 꿈이라 그러하던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본 결과.

  이 앞으로 점점 나아가다 보면 탈출구가 보일 수 있다. 짧고도 깊었던 고심 속에 내려본 결론이었다. 그러니, 무거운 발을 뻗었다. 드넓은 바닷 속에 빠진 느낌이었다. 분명 가위에 눌릴 때도 이러했을 터다. 심해 속에 가라앉아 어찌 해야할 지를 모르니, 무작정 벗어나려고만 애쓰는 것.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도 그러할 거다. 갑작스런 상황에 놓이면, …도망치는 방법이 살 길이라 그리 여기고 있을테니까.

  현실, 아니. 환상에 눈을 떠보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전히 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채로 앞으로 걸어나갔다. 작은 희망이라도 믿어보란다. …이런 마인드로 바삐 걷다보니, 흩뿌린 안개처럼 정신이 아른거렸다. 허나 그럼에도 아니한 내 발은 움직이고, 안정적인 호흡을 가다듬는다. 지금 당장이라도 공중에 벌어진 틈을 부수고 나아가고 싶었다. …그래, 그럴 수는 없겠지. 눈앞에 벌인 현실 아닌 현실을 인정한 채, 그저 침묵의 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아아, 그렇게 걷던 참일까. 멀리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고막을 뚫어버릴 정도로, 어지럽고도 생생히 들려왔다. 분명, 서럽게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나는 거짓말쟁이야."

  이명 따위가 아니였다. 누군가 옆에서 속삭이는, 아니. 내게 오라며 구슬피 유혹하는 울음소리. 들리는 것은 목소리 뿐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서, 생각났던 것은… 다름 아닌 도망이었다. 도망만이 살 길이다. 이런 모순적인 속담이 있듯이, 하물며 제 꿈에서 들려오는 남의 목소리가 공포스러웠기에. 그래, 내게로 울부짖는 그 사람의 소리가 무서웠다. 자신을 거짓말쟁이라며, 더는 돌아갈 수 없다며 비하하는 그 사람을 내가 감히 어찌할 수 없는 거다. 아아, 싫다. 가고 싶지 않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꿈에서 깨어났으면, 소리가 들려오는 반대쪽 방향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양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가슴에 추를 달아놓듯, 소리가 되풀이 될 때마다 무거운 추가 가슴을 뚫고 하나씩 추락함을 느꼈다. 끝없이 가라앉아, 이내 몸이 주저할 것만 같았다. …아아, 그래. 그것이 무서웠다.

  "제발 날 구원해줘."

  그것이 무서워서, 멈춰진 사고회로라는 이름의 톱니바퀴를 맞물렸다. 도망칠 바에는 미친 짓을 저지르고 나서야… 죽어버리자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게 아니라면 만사 오케이라고. 그렇기에 힘껏 무거워진 몸을 억지로 조종했다. 낡아 허물어진 기계가 누군가로 인해 조종당하는 것처럼. 나도 그리 움직였다. 괴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정신없이 걸어보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바탕이 시야에서 점차 사라져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걷고, 걷고, 또 걷다 보니 조금씩 비춰지는 낯선 그림자에 서둘러 발을 재촉했다. 그리 먼 길도 아닌 주제에 숨을 헐떡였다. 다리에 힘을 실어내지 못해 몸소 부림치며 한 가지 소원을 신에게 빌어보았다. 

  신이시여, 이 끔찍한 환상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외쳐보니 감춰진 그림자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주저앉아 소매로 눈물을 감추며 훌쩍이는 어린 아이. 아아, 한 사람을 연상케 하던 아이의 뒷모습. …단언하게 '싫다'고 부정할 수 없는 사람.

  "네, …네가, …왜?"

  그는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연 그림자만이 그의 애절함을 돋보일 뿐. 길고도 짧게 땋은 뒷머리가 거슬려 부리나케 뒷걸음질쳤다. 짙은 홍등빛 머릿결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결국 내가 도망치는 신세인 걸. 허나 어째서, 어째서 과거의 그가 나의 꿈에서 울고 있는 것인가, 이 타이밍에 눈을 뜰 수 없는 나는 무엇인가. 죽은 생선처럼 눈을 크게 꿈벅거리는 나는… 왜 살아있는가.

  그래, 그것. 그것이 무서워 걸음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후진을 시작했다. 그에게로 향하였던 시선을 비어진 공간, 휑한 잿빛 공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이 닿았다. 깨어날 수 있을 법한 흰 손이 닿았다. 나의 손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미는 듯한 손이었다. 희망이 보였다. 결국 신은 나의 편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그래, 환희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돌려 나의 '구원자'라는 이의 얼굴을 보았다. 현실에 눈을 뜨고 싶었다. 허나 신뢰는 어디에도 없었다. 훗날에 믿었던 신은 사고로 죽었을 것이다.

  나의 손을 잡아준 사람은 네가 아니었다. 전까지만 해도 훌쩍이며 울던 어린 날의 너였다.

  "이게 당신의 현실이야."

  "…어?"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줄까?"

  그의 어린 손이 나를 더더욱 밀어냈다. 나를 앞당기는 그의 손이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머리에서부터 천천히, 억지로 자아내는 불씨가 나를 태웠다. 아아, 뜨거워진다. 마치 용암에 빠져든 것처럼. 괴로움에 한계를 느꼈다. 급한 마음에 입으로 불어낸 인공 바람마저 나를 배신했다. 버텨낼 수 없어 몸을 뒹굴었다. 머리를 붙잡았다. 뇌가 잘근잘근 타는 느낌이 무서워서, 아니. 고통에 몸부림칠 바에는 내 존재를 깨끗히 지우고 싶어서.

  내 자신이 붉게, 붉게 타오르는 괴로운 시야 사이로 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갇혀진 꿈에 존재하는 이는 너밖에 없단 이유로, 이기적인 이유로 나는 네게로 손을 뻗어 여린 옷깃을 붙잡았다. 놓을 수도 없게, 꽉 붙잡았다. …'살려줘'. 마음에도 없는 마디를 뱉고 말았다. 허나 그는 나를 떼어냈다. 오히려 작은 발로 나의 몸을 짓밟으며, 통쾌하단 표정으로 나를 깔보고 있었다.

  "이걸 선택한 건 당신이야."

  죽을 거면 얌전히 죽어줘, 형씨. …영원히 현실에 눈을 뜰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어느 누군가들의 울음소리가 나의 귓전을 잔혹하게 맴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