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지긴카무] 흐르던 시간 속, 찾아낸 여름날의 당신 (下)
Dear. YOU?
눈을 떴을 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손과 발이 얼어붙은 사슬에 묶여 꼼작도 할 수 없이 멀쩡한, 아니. 피폐해진 두 눈동자를 허공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애원해도 나를 구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걸 자각했을 타이밍에 항상 녀석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일 년 전에도, 물론 지금도 변함없이 녀석은 나의 정점에 우뚝 솟아서는… 멋대로 아래를, 아래를 파고든다. 자신의 직위를 ‘나’라는 존재와 미개한 괴수와 함께 삼켜버렸다.
녀석은 항상 갇혀진 방에 멋대로 발을 들인다. 공기마저 차단되었던, 아아. 산소는 얼어죽을, 이산화탄소를 들이키며 거친 호흡을 반복하는 나에게로 다가온다. 녀석이 무서워서, 아무리 구석에서 몸을 웅크려 죄인처럼 벌벌 떨어 봐도 결국 녀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터였다. 항상 그가 내게로 발걸음을 돌리면 반사적으로 입을 연다. …살려달라고, 이젠 지쳤다고. 없던 눈물까지 쥐어짜내며 사슬에 묶인 손발을 죽어가는 생선처럼 파닥여도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은 지옥의 톱니바퀴와 함께 굴러가고 있었더라.
아이컨텍, 녀석은 무릎을 굽혀 텅 비어있는 나의 눈을 마주하더니, 이내 벗어날 수 없도록 아래를 향한 나의 턱을 억지로 들어올린다. 야토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덧없이 실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잡힌 손의 압박이 독사처럼 주위를 위협적으로 감싸 돈다. 그것이 무서워, 너무나도 무서운 나머지 질끈 눈을 감자 이 모든 걸 파악하고 있던 그는 잽싸게 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엉겨 붙였다. 녀석과의 입맞춤은 처음에만 해도 하염없이 어설퍼 입술을 내어주지 않았거늘, 일 년이 지나버린 지금은 완전히 몸에 베어들어 녀석의 리듬에 제 의사도 없이 맞춰주고 잇더라. 그래, 내 자신이 한심했다. 녀석의 물컹거리는 입안의 물체가 나를 헤집는다. 물체와 물체가 엮여 묘한 기분을 안기고, 약 오르는 달콤한 자극에 저절로 웃음을 그려낸다. 벗어나고 싶었다. 분명, 그의 그물에서 벗어난다며 허우적거렸건만, 녀석의 짙은 스킨십 따위에 본능을 억제할 수 없던 이유는 무엇? 가엾은 상황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바다를 등지는 황혼녘처럼 아찔하게도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 이는 그가 나의 치열을 까칠한 고양이가 혀로 핥아주듯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나서야 금세 나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형씨.”
캄캄한 칠흑에 젖어진 홍등색의 땋은 머리가 고스란히 나의 어깨를 스친다. 그의 얼굴은 나의 목을 향하고, 이는 마치 사과를 베어 물듯이 새하얀 앞니로 땀에 흥건히 젖은 목을 천천히 핥아 올렸다. 이윽고, 방심하던 찰나에 치아를 세워 짐승처럼 달려든다. 짧은 키스와 베어 물기를 반복한 나머지 끊긴 신음이 연달아 새어나왔다. 아파, 괴로워. 이는 결코 부정적인 신음이 아니었던… 되려 환희를 감추던 나의 소리였다는 것에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아니 저었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상황이 애처로웠다. 격하게 부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명령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꼴좋은 허울을 입 밖으로 내뱉어도 녀석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벌써 일 년째 매일 이렇게 나를 가둬놓고서, 지겨운 키스를 되풀이해야만 한다. 즐겨 입던 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졌고, 갈 곳을 잃은 동공은 자취를 감췄다.
공적을 유지해가며 죽음을 바라고 있으면, 항상 나의 앞에 녀석이 나타나 또다시 새로운 벽을 세워놓고 이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무겁고 단단한 그의 벽에는 늘 그러하듯이, 같은 글자가 뼛속 깊이 박혀져 있었다.
“……꺼져.”
내게서 벗어나지 말아줘, …라고. 아니, 그가 항상 방을 나가면서 마지막을 매듭짓는 말이었다. 아무리 강렬한 쓰나미가 나를 몰아 덮쳐도, ‘자존심’이라는 세 글자가 내부의 방벽으로 바뀌어, 그래. 녀석의 앞에 나의 자존심만은 무너지지 않는다. 긍지를 갖고 이 끈질긴 쥐덫을 빠져나가자. 벗어날 수도 없다면…… 나락에 뛰어들자. 그럴싸하게 죽어버리자. …그리 다짐해가며, 몸을 허공에 소리쳤다. 당당히 그가 보는 앞에, 녹슬어가는 사슬을 짓밟고서 제 자신을 밀어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가뿐히 밀어내고, 뒤를 스치는 어느 누군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감각을 사무치게 받으면서까지 녀석을 거부했다. 살기 위해 허둥거렸다. 마치 지상에서 숨을 이어나갈 수 없는, 사람이 되고팠던 인어처럼.
“이런, 이런.”
“…….”
“역시 형씨는 내 기대를 져 버리지 않았어.”
야왕의 사슬도 끊더니, 현실에 들이닥친 사슬도 술술 풀어내고…. 당신은 강해. 이 때까지 가둬놓길 잘했어!
재미있다며 감탄사와 함께 물개박수 치는 녀석은 나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져간다. 녀석을 대신하여 보이는 이가 있었다. …그래, 나의 사람. 빌어먹을 V자의 앞머리. 틈만 나면 남의 집에서 시도 때도 없이 키스만 퍼붓는 건방진 사람. 녀석이 나를 쓸어내릴 때마다, 다른 환상으로 그려내고 마는 네가 보고 싶다. 내가 사라진 이후,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 편의 감정이 다른 한 편의 애석함을 뒤바꾼다. 말뿐만이 전부인 녀석의 기분 나쁜 칭찬보다, 다정히 나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역설을 애용해 작은 비수를 내리꽂는 네가 보고 싶다. 그 마음은 고통보다 배로 늘어나서는, 이제 더 참을 수 없다며 다시 한 번, 강하게 발악하며 어두운 천장을 향해 눈물을 떨군다. 새는 흐느낌을 입술로 세게 깨물어가며 소리를 차단했다. 억지로 사슬을 끊어내려 해도 쓸데없이 흉한 자국만이 늘어난다. 핏줄이 끊길 것만 같아 우러나오는 호소를 눈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에게 고한다.
“그래도 안하는 게 좋을 거야.”
짓궂은 나의 발악에 능글거리던 녀석의 표정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확실히 동정어린 시선에 가까웠다. 두 손목과 발목을 둘러싼 무거운 사슬의 끝에는, 깔리면 곧장 죽을 법한 큼직한 돌이 맞은편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널부러진 사슬을 따라 커다란 돌에게로 시선을 돌리면, …현재 겪고 있는 나의 처지와도 같은 그만한 돌도 십자가처럼 가로, 세로, 가로, 세로. 사슬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그래, 무리다. 한 순간에 깨닫고 만다. 절대 벗어날 수 없다. 희망을 가진다 하더라도 장애물 하나에 제 발이 걸려 넘어지면 그 자리에서 게임 끝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애써 부정해도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허무한 정적만이 싸한 분위기를 반겨줄 뿐.
결국 쥐어짠 힘을 풀어냈다. 자포자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손을 놓으니, 만족하다는 듯 녀석이 해맑게 웃었다. 그래, 너는 결국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녀석의 본심이 내게 들려오는 둥, 마는 둥.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지겹지도 않냐?”
“뭐가?”
“죄없는 사람을 끌고 멋대로 묶어놓은 이런 미친 수작….”
“전부 당신을 위해서야, 형씨.”
나의 말을 멋대로 가로막은 그는 맑디맑게 웃어보였다. 내 기분이 어찌됐든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그의 마인드가 나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든다. 녀석의 웃음은, 살며시 그 가녀린 손의 촉감마저 어느 순간 유리 파편이 되어 어딘가를 푹. 관통한 뒤에 밀려오는 쓰라림에 속이 거북해졌다. 허나 최후로 이를 법한 그의 말에 어지간히 지탱해오던 나의 평행이 산산조각으로 갈라졌다.
“그거 알아?”
“…….”
“난 당신을 영원히 이 곳에 가둬둘 거야.”
잘못 들은 말이 아니었다. 따가운 가시라 굳게 믿었던 그의 말은 어느덧 날창이 되어, 나를 죽였다. 나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칠 수 없었다. 전까지만 해도 구원을 기도했던 고통은 흔적도 없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의 비웃음만이 부서진 심장을 삶은 감자처럼 매서운 속도로 으깨버린다. 그는 말한다. 내게 말한다. 나를 위해서? 아니, 자신의 ‘유흥’을 위해서.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365일이라는 시간 동안 죄수처럼 어느 모를 방에 갇혀 한없이 울부짖은, 나는? 이게 어째서 나를 위한 것? 구르던 먼지가 웃다 지나갈 소리야. 어처구니없는, …애초에 ‘나를 영원히 이 곳에 가둬둔다’ 라니. 협박이란 흉기를 내 앞에 들이대는 이유는 무엇? 아아, 그래. 아직까지는 본보기? 그렇다면 어째서, ──왜?
죽어있던 동공은 다시 그 때처럼 정신없이 격한 춤사위를 뽐냈다. 그래, 처음 이 방에 갇혔을 때처럼. 벌벌 떠는 입은 차마 열지도 못해 눈물을 흘러내렸다. 한 방울, 두 방을…. 쉴 새 없이 볼을 타고 내리는 뜨거운 물방울은 차디찬 바닥에 내리붓자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증발되어, 사라졌다. 흘리는 눈물의 온도와 바닥의 상태가 어찌됐든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미친, ……새끼야.”
“흐응, 왜?”
“웃기지 말란 말이야…….”
어리둥절한 낯짝으로 나를 향하는 그에게 실소를 그려냈다. 말이 되는 소리를 씨부리라며, 독설을 이어 끓어오르는 분노에 묶여있는 발을 대신해 무릎으로 가까스로 몸을 세운 뒤, 두 손을 뻗어 가만히 허리를 숙여 나를 응시하는 그의 목을 감쌌다. 아니, 있는 힘껏 그의 목을 조였다. 허나 나의 위력에도 그는 웃는다. 미세한 떨림조차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여유롭게 웃으며 입맛을 다스리듯 혀를 낼름거리는 녀석이 왜 그래? 자유분방한 한 마디와 함께 고개를 기울일 뿐. …그래, 미친놈이었다. 녀석은 완전히 미쳤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개처럼 만들다니, 죽어야 마땅하다. 죽어야만 해.
──당장 내 눈앞에서 죽어버려. 그의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을 강하게, 강하게. 없던 힘도 마저 방출했다. …아아, 그래도 너는 괴롭다는 진동만을 이어갈 뿐. 죽지 않았다. 아아,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의 목을 조이면 조일수록, 손해 보는 사람은 바로 나였기에. 쥐고 있던 힘은 제 스스로 놓아버린 지 오래 전의 일이었다. 수차례 당해온 그의 ‘놀이’에 지친 나머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나의 실질적인 형태들을.
“일단 이 더러운 손부터 놓아줄래?”
“…….”
“이미 당신은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
그의 진심어린 대답에 조심스레 그의 목을 붙잡던 손을 떼어냈다. 그의 대답에서 진심을 알 수 있었던 건, 미세하게 떨고 있던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녀석도 나름 인간의 본질이었는지, 고개를 돌려 몇 번을 작게 헛기침을 반복하고 나서야 다시금 불안정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윽고 뱉은 나의 짙은 한 숨은 복부에 힘껏 실려 오는 그의 압박과 함께 요술처럼 잊혀졌다. 그의 주먹이 나의 명치를 내려치고, 반항하지 못해 그대로 바닥을 굴러버린 나는 뼈저리게 파고드는 고통에 연달아 신음을 흘려보냈다. …역시, 나한테도 힘이 남아있었구나. 위태롭게 숨을 바삐 내쉬며 그가 입을 열기를 잠자코 죽은 쥐처럼 간절하게 기다렸다.
아아, 싫은 나날이다. 특히나 ‘오늘’이라는 날짜는 내게 지옥을 안겨주었다. 입을 열 때마다 이유 없이 괴로운 신음을 흩뿌린다. 의뢰인이라면 몰라도, 하필 나보다 어린 애새끼한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니, 분이 차올랐다. 지금 당장 일어나, 검을 쥐어. 주먹을 휘둘러, 쌓였던 만큼 녀석에게 분풀이를 시도하고 싶었다. 허나 내 허리춤에 항상 채워진 검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뒤이어 겪은 상상초월한 데미지에 차마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완벽한 녹다운, 나는 일어날 수 없었다. 그저 흐릿한 눈과 눈 사이로 한 층 진지해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아, 또 보여진다. 녀석의 모습이 아니었던, 새카맣게 흐려졌다 나타나는 사람.
“히지가타…….”
내 시야에 드러나는 사람은 녀석이 아니었다. 바로 너였다. 히지가타 토시로였다. 녀석을 대신하여 그가 찢어진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제대로 마주하고 있다. 이제야 선명하고, 뚜렷하게 나타난 너의 모습에 나는 웃을 수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가늘게 입꼬리를 올리니, 그이도 함께 웃어주며 널부러진 내게로 다가온다. 가까운 거리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이 기분은 뭘까. 숨이 가빠져온다. 허나 나는 일어나야만 했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기는 듯한 그에게 달려가야만 했다. …일어나, 일어나야만 해. 눈앞에 네가 있어, 그 때처럼. ……다시, 돌아가게 해줘.
그렇게 너의 이름을 읊조리고, 지그시 눈을 감아보았던 어느 때였을까. 아니, 오늘이었을까. 깊숙이 무언가가 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한 부분이 망가졌던… 아아, 아니. 꿈이 아니었다. 날이 선 흉기가 나를 관통했다. 결코 내가 한 짓이 아니었다. 당연히, 내 사람이 저지른 짓도 아니었다. 허나 내 앞에는 그가 서 있다. 환상을 보는 게 아니다. 확실히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거다. ……그리 믿고 싶었다.
“나를 눈앞에 두고 ‘그 놈’의 이름을 부른 벌이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를 찌른 범인도, 나의 머릿속을 자아내던 그의 모습마저 매연에 휩싸여 헤매이고 있다. 헤매이는 건 바로 나였다. 그동안의 나는 그가 아니었던 다른 이와의 놀음에 억지로 취해 있었다. 그러니, 더는 그에게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놀다 버려지는 장난감이라고 여겼다. 허나 어리석게도 나는 네가 보고 싶다. 거짓으로 뭉쳤던 나의 진실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히지가타, 보고 싶어. 이젠 영원히 전해질 수 없겠지. 마지막에 흘려보는 눈물은 의외로 짜게 느껴졌다. 이것이 나의 엔딩이다. 어느 순간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너의 이름을 외쳐도 허공 속으로 울려 퍼져, 흔적 없이 사라졌다. 결국 닿을 수 없다는 증거겠지.
……아아, 앞이 보이지 않는다. 점차 어두워진다. 나의 외침마저 밤낮을 알 수 없던 허물어진 방구석,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