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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무긴] Ever, Ever, Never

Sandel 2016. 5. 14. 17:08


  길이 보였다. 그를 자유로 이끌 수 있던 유일한 길은 수수하고도, 전 세계의 희망처럼 활짝 펼쳐져 있엇다. 시도때도 없던 짧막한 레이스를 끝낼 시간이 왔다는 뜻이었다. 아아, 신이시여. 그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작은 염원을 읊조리더니 열린 길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이것이 마지막, 마지막이야. …마지막.

  안도에 찬 얼굴과 쉴 틈 없이 내리 쏟는 땀줄기가 그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열매 터지듯 지저분하게 까지고, 터져버린 굳은살을 외면하고 자유를 끌어안은 벽에 양 손을 짚었다. 그는 작게 고통스런 신음을 내고 있었으나, 금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연스레 웃었다. 대놓고 크게 웃을 수 없으니, 깊게 숨을 들이키고, 마시고, 들이키고, 마시고, 들숨과 날숨 사이로 희미한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가 찬 일이지. 허나 그는 웃었다. '자유'란 이름 앞에 간지럼 타는 배를 살살 잡고선, 웃었다. 이렇게까지 도망친 그는 자신이 행복을 누려야만 한다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아아, 헌데 이를 어쩔까. 그의 눈앞에 놓인 행복이, 자유가 사라졌다. 애초에 그런 것 따윈 없었다는 듯이,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존재를 없애가는 안개처럼, 그의 자유는 숨을 죽였다. 그의 행복은 불에 탄 재가 되어 점점 사라져만 갔다.

  미친 사람처럼 웃던 그는 웃고 있는게 아니었다. 터벅, 터벅.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무서워 스스로 소리를 지워버린 것이었다. 억지 웃음마저, 안타깝게도 그 이유였다. 그래, 그가 방심하던 사이 멀리서부터 가까운 발걸음 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다. 구두를 신은 듯한 사람의 둔탁한 걸음 소리였다. 누군가에게 경쾌한 기분을 안겨주는 소리였으나, 다른 누구에게는 다리를 벌벌 떨며 주저앉게 만드는 소리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후자에 속했다. 어찌나 가엾던지, 벌써부터 희고 흰 두 물줄기를 눈가에서 부터 쏟아 내리더라.

  허름했던 발걸음 소리는 조금씩 무겁고, 무겁고, 무거워져선 그의 심장마저 그물로 붙잡아 끌어내릴 기세였다.

  "잘못했어."

  "…."

  "내가 전부 잘못했어."

  간절함이 매료된 말뿐만이 그의 주변을 올라 타서는, 이내 그에게로 걸어오던 한 남자의 귓전을 맴돌았다. 가로막힌 벽을 타고 오르기에 불합리하게도 그의 신체와 걸맞지 않았다. 대체로 불공평한 상황이었다. 게임 아닌 게임의 승자는 이미 정해진 꼴이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남자는 하염없이 몸에 진동을 일으키던 그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아, 정말, 정말로. 도망칠 곳은 없었다.

  "형씨… 아니, 사카타 긴토키."

  남자의 눈에는 그의 행동이 귀여운 어린 양으로만 비춰졌다. 아아, 남자를 가리던 햇빛은 사라졌다. 대신 그의 모습은 남자에게 가려져 보일 수 없었고, 그가 조심스레 고개를 올렸을 때 공포로 가득 찬 눈동자가 깊은 한기를 불러들였다. 그에게로 손을 뻗으려는 남자의 손길을 피하려 했으나, 역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남자가 하는 모든 짓을 그는 모조리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피하면 남자가 취하는 행위가 배로 불어나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아아, 그래. 지금부터 시작이구나.

  남자는 주저앉은 그를 살포시 끌어 안았다. 어깨 위에 사뿐히 얹은 주홍색의 가지런한 머리카락이 그의 볼에 닿아 내렸다. 남자는 조용히, 정적을 유지해가며 허리를 끌어안던 손을 천천히, 위로, 거리낌 없이 그의 어딘가에 얹었다. …어딘가에?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소리는 아니었다. 아아, 그의 목소리였다. 남자, …아니. 카무이는 양 손으로 그의 목을 붙잡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꽉 조였다. 숨통을 틀기 시작했다. 그조차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의 힘이었다. 압도적인 고통에 버둥거리는 그의 절박한 신음 소리에 카무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 잠시, 아주 잠시였다. 이내 이걸 바랐다는 듯이 광기를 내세우던 카무이의 웃음만이 그를, 허공을 죽였지만 말이다.

  그는 어느정도 버티려 안간힘을 써보았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면서, 손에 남아있는 힘을 카무이에게 쓰지 못하면서까지, 버텨냈다. 미친 모습을 자아내고만 있었다.

  마치 너에게 죽느니 살인범에게 맞아 뒤지겠다는 것처럼.

  허나 인간에게 한계가 있듯, 그에게도 버텨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을 고하는 종이 울리는 듯했다. 카무이가 이전보다 더더욱 희고 흰 치아를 드러내며 짓궃게 웃었다. 이제 끝이야, 사카타 긴토키. 카무이의 속은 훤히 드러났다. 광기에 휩싸인 그가 입을 열었다. 세상이 꺼져라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형씨는 내 거라고─!"

  거짓없는 발언은 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상황을 끝마쳤다. 찌그러진 그의 눈살은 마지막 침물이 턱을 타고 흐르던 동시에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아아, 그는 죽었다. 죽지 않았다. 사카타 긴토키는 죽었다. 허나 이 광경을 훔쳐본 사람은 물론이요, 자연스레 마주친 사람조차 없었다. 당연했다. 누구든 이 상황을 보고 있더라면, …뒤는 아무도 알 수 없을 터였으니까.

  카무이는 그의 생사를 외면했다. 그가 살아있는지, 죽어있을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만 같았다. 카무이가 양 손을 풀어 그의 목을 놓자 바람에 휩쓸리듯 그의 몸이 아래로, 아래로 널부러졌다. 이윽고 쓰러진 그의 등과 다리를 양 손으로 들어 올렸다. 공주님처럼 안아 올리는 것에 수치따윈 없었다. 죽은 시체처럼 눈을 감고 있는 그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카무이에게 안겨 걸어가는 것도, 살기가 사라진 카무이의 웃음 뒤에 남아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도.

  "형씨, 나 우주 해적왕이 됐어."

  "…."

  "난 절대 형씨에게 축하를 받고 싶어서 데려가는 게 아니야."

  "…."

  "그저 당신을 내 옆에 두고 싶을 뿐이야, 평생. …죽을 때까지."

  카무이는 그를 안고 걷기 시작했다. 평생토록 원하던 사카타 긴토키의 자유는 카무이의 손에 먹힌 채, 유유히 '지옥'이란 길을 함께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아,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그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