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겨울 바람이 굳게 닫힌 창문을 두드렸다. 다급함을 요청하는 바람에 몸을 비틀거리며 손을 뻗어 제 머리 위에 있는 창문을 열어보았다. 조그맣게 벌어진 틈 사이로 살가운 소리와 함께 신바람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춤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선반에 놓인 각종 물건들을 휘몰아치고, 바닥에 내려놓은 두 세권의 책 페이지를 멋대로 펼쳐내며 직접 표시해둔 곳마저 외면한 채 중간과 끝을 다다르려 했으나, 그저 갑작스레 들이닥친 바람의 모습을 애써 눈을 감고 느끼기에 바빴다. 휘, 휘, 하고 휘파람부는 듯한 소리가 제 귀를 감싸 돌았다. 너무도 반가운 소리,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좋았다는 이유로 굳게 닫힌 입술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웃어보였다. 유리가 깨지듯 엉망진창인 풍경이 부서졌다. 결국 안타깝게도 이것은 제 상상에 몸을 맡겼을 뿐, 갈라진 현실을 손으로 비집었다. 팔을 벌린 지옥이 내가 안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을 움직였다 싶으면 언제나 제자리였고, 침대를 벅차고 일어난다 싶으면 침대에 누워 가만히 연분홍빛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옆에 있는 서랍 위에 얹어놓은 책을 집었다 하면 팔과 다리가 옆구리에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뒤쳐지는 것만 같았다. 뒤로, 뒤로 도망친다 해도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져, 신체와 사고의 다툼을 이어가며 무언가를 그려갈 뿐이었다. 그것이 어떤 장면인지는 누구도 모르는 나 혼자만이 알 수 있었다. 아아, 알아야만 했다. 고 정의해야 옳은 답일 터이지만 말이다.

  무엇도 할 수 없는 나의 앞에 신은 감사하게도 그나마 흐릿하게 볼 수 있는 두 눈동자와 금붕어처럼 뻐끔거릴 수 있는 입술만은 고이 남기고 모든 것을 앗아갔다. 너무도 잔혹한 현실은 내게서 느끼지 못한 온기를 앗아갔고, 끝내 돌아온 것이 있더라면 세상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방법과 인간에서 괴물로 만든 신을 원망하는 방법. 그리고 '추억'따위를 기억하지 못해 방황하는 나의 뇌를 두고 이별을 고했다. 

  …나는 그들을 증오했다. 그 어떠한 애정조차 줄 수 없어 쉽게 내팽겨친 그들이 한심했다. 좋은 사람들이 너를 돌볼 거란다, 라며 장난감 버리듯 과감히 던진 그들에게 공포를 느꼈다. 허나 스스로 뱉어놓은 단어의 정의조차 새하얗게 잊고 난 뒤에야 그들을 이해하고, 제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도 같은 꿈을 그렸다. 그리 거대하고도 웅장한 모습은 바라지 않았다. 누군가 보면 배를 잡고 웃을 법한, 소심하기 짝없는 풍경이 다시 한 번 눈앞에 그려졌다. 마치 흰 도화지 위에 검은 펜이 아닌 형형색색의 크레파스로 선을 잇고, 완성된 형체가 불쑥 튀어 나와 제 눈을 즐거이 움직이게 했다. 처음에는 초라한 집에서 시작해 구불구불한 곡선은 들판이 되어 함께 뛰어놀자는 듯이 제게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아아, 꿈조차에서의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장난스런 곡선의 손짓을 따라 손을 내밀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곳, 주어진 현실과 달리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환상을 '천당'이라 불렀다. 오로지 그곳에서만이 행복을 느끼고, 무겁게 들고 있던 '병'이라는 이름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에, 지긋이 눈을 감아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떠보았다.

  눈을 뜨자마자 드러난 곳은 천당이 아닌 지옥이라 불리는 침대 위였다.

  "…카무이."

  "…정신이, 들어?"

  미미한 귀를 뚫고 나긋하게 들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천당을, 꿈을 부쉈다. 허나 그나마 다행인가 싶은 것은 자츰 내려간 눈꺼풀을 놀래킨 사람이 다른 이가 아닌 그이였기에 안심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매마른 눈동자에 힘을 주어 그가 있는 쪽으로 비스듬히 돌려보았다. 그의 얼굴이 아닌 흰 가운이 너무도 반가웠다. 구름을 연상케 하는 그의 가운에 웃음이 나오려 했다. 허나 벙진 입술은 그이를 보자마자 괴로이 고통을 억눌러가며, 천천히 입을 열어 소리 없는 의사소통을 이어내었다.

  "보고 싶었어요."

  닿을리야 닿을 수 없는 여섯 글자는 허공을 흩뿌리나 싶더니, 정확하게 그이에게로 전달되어 돌아왔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의 점잖은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아, 내 말을 들어줬어. 그는 의사니까, 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목소리와 운명을 함께 느끼기에 알아주는 걸지도 몰라.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는 나의 감정을 나누고, 느끼고픈 감정을 대신 느끼고 실감해주는 좋은 의사였으니까.

  "응, 나도 보고 싶었어."

  그의 팔이 연분홍빛 천장을 가로막았다. 차원을 넘듯 훌쩍 뛰어넘어, 천천히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의 감촉을 느끼지 못했다. 투명인간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오랜 시간을 정들지 못한 곳, 갑갑함에 틀어박혀 인간의 감각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느끼고 싶었다. 차라리 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고팠다. 그를 자아낼 수 있는 꿈이라곤 내게 없었다. 아무리 수 천 번을 넘게 꿈에서 그를 바라본다 한들, 현재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이를 상상했다. 천당과 지옥 사이에서 다정히 제 이름을 부르는 그를 좋아했다. 물론 환자와 의사로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경하는 의사로써 그에게 깊은 존경심을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제 몸이 한계를 오고가는 것은 그이로 인해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아주 가끔 그와 함께 있으면서도 헤어나올 수 없는 야릇한 시나리오가 아스라이 스쳐 지나갈 때도 있었다.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주제에, 잃어버린 '사랑'을 그에게 갈구하는 나는 언제나 울고 있었다. 아픈 환자라 협박하며 사랑을 쟁취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럴 때마다 나는 뼈저리는 고통을 가슴 깊숙히 실감해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래야만 하는 존재였다.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감정을 감내하며 닿을 수 없는 그에게로 몰래 입을 놀려보았다.

  "선, 생님."

  "…좋아해, 요."

  꿈을 뛰어넘는 감정을 느끼기엔 나는 너무도 약한 사람이었고, 한 가닥의 붉은 줄을 끝내 붙잡고 매달리는 제 자신을 남몰래 한탄하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Posted by San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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