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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1.18 ㅍㅌㅇㄱ
  2. 2016.11.12 [에이케이] 구원
  3. 2016.11.10 [츠키히나] 무제
  4. 2016.11.07 [카게히나] 인어 이야기
  5. 2016.11.05 [카게히나] 사랑
  6. 2016.11.02 [에이케이쿠로] 죽음, 그리고
  7. 2016.10.29 [카무긴] 무제 (2)
  8. 2016.10.22 [에이케이] 온기
  9. 2016.10.18 [카무긴] 나비
  10. 2016.10.16 [에이케이] 맹세

ㅍㅌㅇㄱ

2017. 1. 1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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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텐쇼인 에이치는 언제나 승리를 추구했다. 그에게 있어 옳고그름 따위는 없었다. 자기 멋대로, 이기심대로, 선택의 걸림길에 있다면 두 말 없이 YES를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승리를 위해 뒤따르는 신하와도 같은 존재였고, 텐쇼인 에이치라는 이름의 정점이 무너지지 않게끔, 다른 이가 차지할 수 없게끔 제지를 돕는 그의 지원군이기도 했다. 다른 말로 취급하자면, 스파이… 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별명이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주변에서 오는 질문은 자그마치 지옥에 불과했다.

  기분은 어때?
  그런 녀석의 옆에 있으니까 좋은가봐?
  뒤따라 권력도 휘두를 수 있고, 좋겠네.
  나도 한 번 그 사람의 곁에 있어보고 싶어.

  질문에서 시작된 말 하나는 곧이어 바램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허나 그들의 쓰잘데기 없는 바램은 그에게 들리지 않았다. 애당초 그는 남들에게 잘 보여지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이를 향한 질문은 역으로 돌고, 돌아 나를 향해 꽂아 내릴 뿐이었다.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나에 대한 질문이 아니더라도, 그를 위한 질문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그렇듯 나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하고 만다.
  그것은 모두 거짓말로 가득 매워진 말이지만 말이다.

  “그냥 그렇지, 뭐.”

  어차피 소꿉친구이기도 하니까, 무난한 정도야. 그렇게 지어낸 허구는 나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잠들 것이고, 그의 앞에 밝혀질 일은 없을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같잖은 질문을 받을 때 즈음이면, 그는 언제나 나의 손에 닿지 않는 장소에 머물러 있었고, 그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행동 자체가 제 몫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야만 그의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말한다.

  또 가는 거야?
  지겹지도 않아? 매일 가는것도 힘들텐데…
  그 사람이 좋기 좋지, 아무리 그래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뒷담은 나의 지옥이었고, 어느덧 나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도망쳤다. 그들을 뿌리치고,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최대한의 속도를 높여, 발을 놀렸다. 그렇게 뛰고, 뛰었다. 불쾌하게도, 그를 향한 비난은 이명이 되어 나의 귓전을 맴돌았다. 마치 밤마다 시끄러이 울리는 모기처럼, 나를 쫓아오는 죄악의 무게처럼, 나를 괴롭혔다. 그래, 이질감이 들었다. 수없이 몰려오는 이질감은 나의 몸을 잡아 당기고, 그의 뒤를 따른 이유만의 죄악은 나의 목을 잡아 올렸다. 아무리 도망치고, 달아나도, 그것은 마치 데자뷰처럼 또다시 쫓아오고 말았다. 지금도, 그렇게, 나는 허우적거린다. 듣고 싶지 않은 그의 이야기를 억지로 들어가며, 고막에 꾸역꾸역 넣어가며, 오늘도 여전히 ‘그곳’을 향해 아이처럼 달려가본다.
  그리 도착하면, 어제와 변함없는 그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메스꺼운 약품 냄새로 가득한 병실 아래, 하늘의 색을 빼닮은 병원복 차림의 그가 나를 향해 웃는다. 그리고,

  “어서와, 케이토.”

  고르지 못한 숨을 다스리던 나를 양 손으로 와락 끌어안는다. 그의 품 하나에 이명이 사그러지고, 눈이 녹듯 천천히 지워져갔다. 그래, 그는 그냥 그런 존재일 리가 없었다. 나는 그가 필요했다.
  오늘도, 내일도, 늘 그렇듯 그의 구원을 받으며 하루를 지탱해야만 했기에, 그가 없는 나날은 상상할 수 없었기에. 따스한 그의 품에 눈을 감았다. 이것이 나의 애처로운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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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나타 쇼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를 자그마치 ‘태엽감기’ 라고 정의했다. 태엽이 감겨지지 않은 그이는 그저 남들과 별 다를 것없는 고등학생이기 때문이었고, 제 스스로가 끼익, 끼이익. 가벼웠던 태엽을 무거이 돌리게 되는 순간 그는 한 순간 코트를 정점하는 고등학생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무거운 깃털처럼, 그에게 있어 태엽은 살아 숨쉬는 존재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었다. 허나 그러는 때면 그의 주변에 몰려드는 화사한 빛에 곧장 도망치고 있었다. 언제나 그의 옆은 사람과 사람들로 가득 매워져 있었고, 희망을 찾아 틈과 틈 사이에 억지로 비집으려 하면 늘 그렇듯 그의 실루엣은 어디에서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겨진 것은 그에게 없는 잿빛 만이 나의 앞을 뒤덮었고, 차갑게 감싸고 있었다. 그래, 지금이야 말하자면, 그가 부러웠다. 그렇다고 가까워질 수는 없다. 네가 모두와 마주하는 태양이라면, 나는 고독하기 짝없는 달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이도 나도 서로 맞물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건, 그의 곁을 찬란하게 돋우고 있던 기사의 보호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애시당초 이름은 기억할까,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이름을 불렀던 적이 있더라도…… 아아, 절대 없었겠지. 당연스럽게도 나는 그에게 비아냥거렸고, 그의 심부를 푹, 푹, 몇 번이고 찌르려 달려들기에 바빴었다. 그저 단순히 제왕, 이라는 한 마디에 움푹 들어간 홈처럼 억지로 과거를 묻어두려 하는 그의 모습이 우스울 따름이었고, 그러한 그의 모습을 제 스스로 만족했다. 나는 그랬다.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을 언젠가 망가뜨릴 수 있더라면, 그토록 바라던 태양을 바로, 제 앞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소소한 바램을 양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버텼다. 기다렸다. 제왕의 자리를 노리려 틈을 엿보았다.그도 그럴것이, 제왕의 곁에는 볼품없는 태양이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그 이유 하나가 내 삶의 파편 하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신의 콧방귀 하나라 여겨도 마땅치 못할 기적이었다. 어찌저찌 기회는 잡을 수 있었다. 제왕과의 말다툼은 이제 질릴 법했다. 웬일인지 그는 체육관 구석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신나게 튕기던 배구공을 양 손으로 붙잡고,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허나 자옥한 주홍빛의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자츰 가라앉아 있었고, 멀리서는 천장을 넋놓아 바라보는 것처럼 보여도, 잔잔하게 부는 바람은 그게 아니야. 라며 나를 부정했다. 용기를 내어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끔, 조금씩, 조금씩 그에게로 걸음을 놀렸다. 허나 이전까지만 해도 환히 웃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배구공을 양 손으로 꽉 잡은 채, 울고 있었다. ──뚝, 뚜둑, 뚝, 그의 눈물방울은 흐르고 흘러 툭, 투둑, 배구공을 적시고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 없이 그저 뚝, 투둑, 후두둑.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그의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에게 다시금, 성큼성큼, 다가가보았다. 그리고 네 앞에 섰다. 단숨에 느껴지는 기척에도 그는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여전히 너는 붉어진 눈시울 아래로, 가엾은 빗줄기를 내보낼 뿐이었다. …그 때였다.

  “츠키시마.”

  나지막이 나의 이름을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그것은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되어 돌아왔다. 츠키시마, 츠키시마, 츠키시마… 결코 꿈이 아니었다. 그는 나의 이름을 옹알 걸렸고, 지겨울 정도로 그의 목소리로 울리는 체육관은 오늘따라 더더욱 크게 볼륨을 높이고 있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싫다고 하기에는 그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유를 묻기에는, 별 거 아닌 사연임이라 여겼다.

  “나, 카게야마하고 싸웠어.”

  물론, 내 예상은 빗나갈 리가 없었다. 허나 이리도 서글피 울고 있는 그가 있었고, 그의 곁에 있어야만 하는 제왕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는 싸움의 증거였다. 얼마만큼 영향력이 큰 다툼인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애시당초 그들의 싸움에 흥미를 갖는 것도 아니었고, 항상 있어야만 하는 일이라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나는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도 몰랐다. 감정조차 없는 장대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허나 오늘도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러한 그를.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심스레.

  “너무 단순하잖아.”

  괜찮아, 다 잊어버려. 라며 그의 앞에 앉아, 망설임조차 없이 흐르던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지겹게, 지겹게 반복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러니까 애처럼 울지마. 그를 향해 옅게도 웃어보였다. …아아, 도대체 어느 누가 다정한 위로를 받고도 눈물을 그칠까. 그의 소나기가 쉴 새 없이 쏟아 흐르고, 서럽게 울려퍼지는 그의 흐느낌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를 위로했다. 그의 소리를 꾹꾹 들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전부였다. 누구처럼 그를 안을 수도 없었고, 누구처럼 너의 모든 것을 눈앞에서 담아낼 수 없었다. 누구처럼 그러기에는 그가 오늘처럼 서글피 울 것만 같아 두려웠고, 또다시 그의 주변을 겉돌다 이내 도망치고 마는 내 자신이 역겨웠다. 억울하게도, 태양이라는 그의 이름 아래 달이라는 작자를 억지로 붙일 수 없으니까. 그렇게, 다시금, 울지마. 라며 중얼거린 채 조그맣게 웃어보였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보여야만 했던 마지막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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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직, 치익── 칙, 어젯밤 xx해안가에서 보라색 비늘이 발견 되었다고 합니다. 사건 현장에는 비늘을 목격한 사람과…… 뽁, 티익. 노이즈만이 가득한 고물 텔레비전의 전원을 차단했다. 콘센트를 뽑았음에도 잔잔히 흐트러지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리모콘은 이미 일주일 전에 고장났고, 그것을 고치기에는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건 전부 부모님으로 인해 억지로 시작된 지옥같은 자취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조차 마찬가지로, 이전 집에 있던 헌 것을 가져왔고, 신세대라고 언급될 물건조차 없는 이 곳이 나의 집임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다. 잔혹한 부모님, 야비한 부동산 중개사. 곧장 그들을 탓하기에는 먹고 살아갈 생활비가 없었다. 생활비가 없었다. 생활비가 거덜났다. 나는 지금 그것이 중요할 따름이었다.
  일조차 내게 등을 져버린 지 오래였다. 텔레비전 하나가 나의 전부였던 판국에, 아르바이트조차 인원이 다 찼다며 거부하는 쪽이 늘었다. 되려 애당초 뽑고 싶지 않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면서까지 나를 밀어냈다. 분명 그것은 황토색으로 바랜 나의 흰 티셔츠와, 세일을 통해 겨우 얻어낸 츄리닝 바지, 질질 끄는 슬리퍼가 원인일 터다. …아아, 알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괴로웠다. 허나 나의 감정을 분출할 수 있을 법한 상대는 어디에도 없었고. 짐을 싸서 부모님에게 다시 돌아가기에는 화산처럼 터질듯한 그들의 타박은 겪고 싶지 않았다. 그저 꿈, 나의 염원, 그것이 걸림돌이라며 장난감 버리듯 나를 내팽겨쳤다. 그렇기에 두 주먹을 꽉 쥐고, 아무도 듣지 못할 혼잣말을 눈물과 함께 엮을 뿐이었다.

  나는 살아남을 거야. 나락같은 현실, 되감을 수 없는 과거, 그 사이에서, 나는.

  노래할 거야. 누구보다도, ──날지 못했던 미운오리새끼처럼. 나의 굳센 의지에는 여러 반론 섞인 반대의 소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런 추잡한 목소리로는 노래할 수 없다며, 노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그렇기에 나는 그들의 싫은 소리를 노이즈라 여겼다. 무슨 말이든, 일리있는 말이더라든, 나는 외면했다.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버티고, 참고, 견뎌내었다. 그러더니, 가슴 속으로 우러나오는 소나기는 툭, 툭, 투둑, 후두둑. 이상하게도 이미 지쳐버렸다며, 어지러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첫시작은 가시처럼 따갑고, 창살이 심장을 파고들듯, 괴로웠다. 어찌 해서든 늘 하던대로, 그럴듯하게 견뎌보니 이리도 찬밥 신세를 얻게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그것도 어떠한 지원조차 없이, 나의 힘으로 말이다. 허나 그럼에도 앞으로의 계획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노래를 한다. 오직 마이웨이. 언제나 될 대로 되라, 그것이 카게야마 토비오의 방침이었다. 허나 오늘만큼은 조금, 일방통행의 과녁이 빗나갔을 지도 모른다.
  최근 내게 관심사가 생겼다. 아마 돈과 관련 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정의하자면… 비늘, 인어, 비늘, …인어의 비늘이었다. 모든 인간이 증오하고, 경멸하는 인어 말이다. 이유는 그저 외모라던가, 생선처럼 푸득이는 인어의 꼬리 때문이라고는 하나, 나의 관점은 조금 달랐다. 인어를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하여금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호감 뿐이었다. 그중에서 인어의 비늘을 발견한 이들은 전 세계에서 놀아나는 억만장자가 된다거나, 유명한 이름의 대학 명찰을 달고 다닌다던가… 갖잖은 소문으로 주변에서 조잘대기도 했다. 그것이 아주 잠깐, 아주 잠시, 거슬릴 뿐이었다. 뉴스에서도 인어의 비늘을 발견했다는 등의 시시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아마 훗날부터 밥먹듯이 떠도는 소문이 그 이유였다.

  ‘카게야마, 그거 들었어? 인어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온다는 걸 알아챌 때, 자신의 신체부위와도 같은 비늘 하나를 떼어, 지평선 너머로 띄워 보낸대. 그리고 그걸 주운 사람은, 어떤 소원이든 지늘을 향해 외친다면── 딱 하나만 들어준대.’

  소문이라기보다는 전설로 알려진 이야기는 태생 이전부터 쭉, 이어져 있다고 한다. 심지어 최근 인어의 비늘을 발견한 사람의 횟수가 늘고, 인어를 잡아다 경매시장에 올리거나 비늘을 떼어가는 ‘머메이드 포획단’ 조직이 종종 떠돈다고 하더라. 허나 너무도 황당스럽게, 그들의 서식지라 치면 바다 주변. 그것도 바다를 등지는 우리집 주택가 앞에서 말이다. 아무리 포획단이란 거장한 이름을 달아도, 인간은 인간인 것이 흠이었다. 새벽마다 큰 소리가 울리고, 군대에서나 쓰이는 소총 소리가 들리고… 그래. 전부 민폐라고 치자.
  응어리로 뭉친 생각의 보따리는 결국 한쪽 방구석으로 던져놓은 채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오고, 가장 먼저 보이는 촘촘한 벽돌 계단을 밟으니, 벌써부터 눈에 확 트이는 모래사장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머나먼 동쪽에서 비추는 태양에 적셔 은은하게 빛나는 모래를 밟았다. 오늘도 밟았다. 늘 그렇듯이, 푹, 푸욱. 언제나 들어도 반가운 소리였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파도없는 바다와 모래가 겹쳐 출렁이는 소리, 저만치서 아무렇지 않게 데굴데굴 구르는 쓰레기 더미… 모두 익숙한 광경이었다. 모든 것이 내게는 익숙하고, 사랑스러웠다. 이것이 현실을 외면할 수 있는 나의 세계이기도 했다. 더위에 미처 아무도 오지 않는 사람, 바람조차 숨을 죽인 매서운 모래사장, 그리고 바다. 흰 오로라가 돋구는 푸른 바다. 마치 팔레트에 짜여진 짙은 푸른색의 물감과도 똑띠 닮은 자다가 눈동자에 들어왔다. 그리고 저 멀리, 바다 전체를 차지하듯 뛰어 오르는 돌고래 하나가 연출을 장식했다. 물론 이 바다에 떠도는 돌고래가 있을 리 없지만 말이다. ──어라, 돌고래, 하나?

  “…뭐야, 저거?”

  나의 숙덕이는 소리로도 저것에는 닿지 않았다. 닿을 리가 없었다. 저리도 멀리 있으니, 손을 뻗어 잡아보기에는 내 자신이 한참이나 무식해보였다. 허나 저능아가 아니기에 확실히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래, 저것은 돌고래가 아니라는 것. 뛰어오르기를 멈춘 저것은 동작을 멈춘 채 중심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손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좌우로 흔들었다. 아아, 마치 내게 인사해주는 것처럼.
  다시 한 번 깨닫기를, 저것은, 그것은 분명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카게야마. 너는 인어가 있다고 생각해?’

  시력이 좋았던 탓일까, 돋보기처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뛰어오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인장처럼 속은 말랑말랑하면서도, 건드리먼 푹 찌를 것 같은 삐죽삐죽한 주홍빛 머리카락. 뽀얀 상체, 그리고 파랑, 파랑, 바다와 어우러진 보석같은 파랑색의 비늘, 지느러미처럼 흐느적거리는 뾰족한 꼬리. 꿈이라고 하기에는, 이를 꿈이라 말할 수 없었다.

 ‘인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전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야. 동화와도 같은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에 놀라 털썩, 푹신한 모래사장 위에 주저 앉았다. 거짓말이 아니야. 스스로 그가 존재함을 실감하려 고스랗게 모여진 모래를 손으로 긁고, 긁었다. 거짓말이야. 스스로 그의 아름다움에 수긍하려 고개를 푹 숙여본다. 그리고, 거짓말이 아니야. 현재 상황을 받아 들이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더위가 두려워 발을 들이지 않는 사람도, 새벽에만 활동하던 포획단도, 바다에 휩쓸려간 조개 파편도, 그리도 아름다웠던 인어 하나도. 남아있는 것은 조금만 더, 하고 그에게 다가가고 팠던 나의 후회가 울렁이는 바다 소리와 함께 파묻혀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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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있어 사랑은 볼품없는 잡동사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도 줄곧 이어온 관념이기도 했다. 나아가, 애시당초 사랑은 단순무식하게, 칭찬이라 여겼다. 남들보다 위로, 우위를 향해, 값진 승리를 향해 오르서야, 칭찬이라는 이름의 사랑을 쟁취한다. 사랑은 승리를 향한 매개체이고, 나를 더 돋보일 수 있는 하나의 장식품.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관념이라 섬겼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은 나를 이렇게 불렀다. …제왕. 처음만 해도 듣기 좋을 법한 별명이었다. 허나 그저 그렇게, 겉치레를 둘러싼 나의 별명은 어느새인가 허무이 무더져 있었다. 이기심에 취해 외톨이로 전략한 제왕에게 다가온, 자그마치 태양과도 같은 이가 눌려 얹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참으로 성가신 꼬마였다. 같은 나이임에도 땅콩만한 키는 물론이요, 어린 아이처럼 높은 톤에다, 아무리 봐도 잘만 놀아나는 성격.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먼지만큼도 없었다. 눈을 마주치면 귀신이라도 본 듯이 달아나고, 친근하게 다가가려 하면 뒷걸음질부터 시작한다. 그는 나를 경계했다. 나는 그를 귀찮아했다. 그렇기에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전학 수속을 밟아볼까, 어리석은 방법조차 망설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그렇게 마주하지 않으려 했다. 그가 나를 경계하듯이, 어느덧 내게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려 했다. 마치 승패가 정해진 줄다리기처럼, 그가 잡은 팽팽한 줄을 반대편에 서서, 과감하게 놓아버렸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억지로 뱉은 안도의 숨이 발목을 붙잡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읏, 카게야마……”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를 무시하고, 외면했다. 여전히 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멤버들의 칭찬, 남자들만의 격한 애정, 그런 것이 나의 사랑이었다. 허나 시간은 흘렀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툭, 툭 흐르듯 시간은 지나갔다. 흘러가는 시간에 비해 주위에서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내가 아닌 그이, 그에게 쏠리는 시선, 관심, 그리고.

  “목, 간지러워. 아프단 말이야…”

  어느새인가 그를 동경하게 되었다. 소홀한 체격, 조그마한 키, 스포츠에 관심조차 없을 법한 그이. 그는 달랐다. 뜀틀을 가뿐히 넘기듯, 나를 제치고 우위를 빼앗았다. 그것이 부러웠다. 그의 실력에 저도 몰래 감탄했고, 부러웠고, 동경했고, 받아야만 하는 사랑을 하고 말았다. 그리 시작된 나의 사랑은 그에게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는 알다가도 모르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아아, 나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나의 사랑은 독특했다. 깨달은 건 그를 만나고 난 뒤부터일까. 나의 시선은 오로지 그이밖에 더는 들어오지 못했다.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그에게 다가갔고, 그를 붙잡았다. 오로지 호기심 아닌 호기심으로, 나는 그를 괴롭히고 만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저 그와 입술을 겹치고, 목을 깨물고, 건드리기에 바쁠 터였다.

  “갑자기 왜, 왜그러는 거야…?”
  “히나타. 밖에 다 들리잖아.”

  제발, 조용히 해줘. 질문은 제 쪽에서 던지고 팠다. 허나 단언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어디서나 휘몰아치는 너의 사랑, 그런 사랑을 나는 ‘질투’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그의 부정조차 내팽겨치고 말았다. …어째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나는 그를 범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허나 그의 가녀린 숨소리는 그것이 옳다며 나를 수긍했다.
  아무도 없는 체육관, 특유의 고무 냄새로 가득한 체육 창고. 눈을 떠보니, 나는 오늘도 그의 사랑을 뺏으려 손을 놀려본다.
Posted by San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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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스미 케이토, 그가 죽었다. 몇몇 이들의 슬픔과, 고통 섞인 애도를 표하고 나니 가을은 이미 끝나 있었다. 굵직한 나무에 매달렸던 치렁치렁한 열매는 남모르게 후두둑 떨어지고, 샛노란 은행잎이 아래를 향해 힘없이 추락했다. 마치 신이 내려주는 하얀 눈처럼. 모든 나무에서 노란 눈을 내려주었다. 그와 어울릴 리도 없는 색의 눈잎이었다. 나는 처량한 눈을 밟았다. 노란 눈을 밟고, 노란 열매를 총총 피해, 걸었다. 왼발, 오른발을 내밀 때마다 노란 눈은 바스락, 바스락, 부르짖는 발악에 뒤로 자빠졌다. 그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소리는 커져만 갔다. 은행잎이 밟혀, 굴러가는 소리로 시작해, 바스락, 바스락. 사각, 사각. 매서운 바람이 어우러지는 소리. 휘이, 휘이. 휭, 휭. 자잘하게 떨려오는 노이즈에 심장이 울렸다. 쿵, 쿵. 쾅, 쾅. 쉴 틈없이 반복되는 방해꾼은 내 발목을 잡았다. 아아, 시도때도 없이 유난스런 방해꾼을 붙잡으려 하면, 언제나 그렇듯 나의 머릿속은 그의 모습들로 가득해진다. 마치 스쳐지나가는 주마등처럼.
  하스미 케이토, 그의 죽음은 불명이었다. 주워들은 얘기로는, 부주의로 인한 교통사고. 그것이 전부였다. 어떤 이야기조차 자아낼 수도, 실현할 수도 없는 교통사고였다. 피해자는 그이, 가해자는 도주. 상황을 목격한 사람, 그를 발견한 사람, 아무도 없었다. 그의 죽음은 허무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들은 전부 모순이었다. 그의 이름을 알린 장례식장, 검은 띠를 둘러싼 그의 학생증 사진. 그리고, 이름 모를 공허함. 그리고,

  “여기가 너의… 아니, 너희들만의 연습실이구나.”

  그의 죽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몇 년이든, 몇 천년이든, 내가 죽고 나서의 세상이든, 시간이 지나면 아스라이 잊혀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 주어진 현실이었다. 그것을 순응하는 이들이 바로 인간이었고, 받아들이는 것조차 능숙한 이들이 바로 인간이었다. 그의 죽음을 동물처럼 받아들인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 너라면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휑한 연습실 안에는 한 벽을 매운 연습용 거울, 미끌미끌한 바닥, 그리고 평범하게 서서 숨을 쉬는 그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땀방울과 땀줄기로 장식되어 있었고, 숨을 헐떡이며 제 뒤에 있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걸어왔다. 이전과 달리 조금 벌어진 동공, 의아한 모양으로 나를 맞이했다. 내게 다가왔다. 터벅, 터벅. 삐걱, 삐걱. 바닥과 마찰하는 그의 흰 운동화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귀를 움츠렸고, 무슨 일이냐며 제 호칭을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나의 신경을 죽였다. 이윽고 분노를 일으켰다. 세포 하나, 하나가 그를 향해 봉기를 들었다. 곧장이라도 죽일 기세로, 달려들려 했다. 아아, 그렇게 달려들었다.
   나는 지옥 열차에 뛰어 들었다. 고작 사람의 목숨 하나, 나의 목숨을 맞바꾼 정도로, 괴로웠다. 나의 고통은 살을 파고, 뼈를 조각조각 으깨었다. 그이도 그럴 것이다. 같은 심정임을 알기에, 심판할 수 있었던 거다. 지금 제 앞에 있는 그를 응징할 수 있었던 거다.

  “키류 쿠로, 너는 가해자야.”

  케이토를 죽였어, 죽였다고! 나는 양 손으로 그의 목을 붙잡았다. 꽈악, 힘을 주었다. 죽은 그이의 한이 배반되어 전해지게끔, 살의를 표했다. 평소대로 웃으려 해도, 웃을 수 없었다. 마이페이스는 온데간데 없이 도망치고 말았다.
   그는 괴로워했다. 고통스런 짧은 신음을 이으며, 자신의 손으로 목을 둘러싼 나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거울 쪽으로 뒷걸음질을 이어나갔다. 허나 그는 나를 잡았다. 나를 받아들였다. 나를 수긍했다. 제 손에 얹었던 손을 옮겼다. 그리고 나의 양 팔을 붙잡았다. 바들바들 떠는 그의 손은 나를 놓지 않으려, 있는 힘껏 꽉, 살갗이 으스러질 정도로 나를 붙잡았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 수준을 넘어, 그를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텐…쇼인.”

  헐거운 목소리, 금방이라도 숨이 끊겨질 법한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목을 조였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나의 괴로움은 영영, 그의 목을 조여도 닿지 못할테니까. 어느덧 나에게도 한계가 재해처럼 들이닥치고, 힘빠진 양 손을 테이프처럼 휘감으려 할 때, 뜨거운 무언가가 손등에 닿았다. 그리고 주르륵, 미끄럼틀을 타듯 느릿하고 빠르게 흘러내렸다. 나의 손등을 타고 시선을 천천히 위로, 위로 올려보았다. 나로 인한 고통인지, 무엇인지 모르는 그의 눈물이 턱을 타고, 나의 손등을 흠뻑 적셨다. 아아, 그는 울고 있었다. 힘없이 울고 있었다. 죽어, 죽어, 죽으라는 나의 혼잣말을 모조리 외면한 채. 투둑, 투둑.

  “언제까지 서로를 가해자라 여겨도 변하는 건 없어.”
  “그걸 잘 아는… 텐쇼인, 너도 마찬가지잖아…?”

  이제 그만하자. 눈물과 동시에 흘러내리는 그의 목 맨 목소리에 손을 놓았고, 그를 놓아버렸다. 그러더니 거울 속의 나는 투둑, 툭. 목놓아 울고, 서럽게 울었다. 아무도 달래어주지 않는, 그이가 없는 연습실 안은 두 사람의 흐느낌이 애처롭게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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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만남은 이러했다. 굳게 닫힌 눈동자를 억지로 열게 하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상하고, 너무도 다정하여 꼭 어느 곳에서든 성공을 쟁취할 수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하찮고, 민폐로 가득 뭉친 내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아마 반대였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무척이나 좋았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리 따스한 그에게 허점이 있더라면, 누구보다도 크게 떠보였던 눈조차 그이의 곁을 떠났다는 것. 가엾게도, 그 이유 하나만으로 토해낼 수 없는 고통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다가갔다고 한들, 그것은 아주 잠깐 사소하게 일어났을 뿐이지만 말이다.
  오늘은 그의 자화상을 그리기로 했다. 대놓고 그의 집에 멋대로 발을 들였고, 무작정 그에게 들이댔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흔쾌히, 까지는 아니나 공포에 몸부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여전히 구원을 바란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우적거리는 미운 오리와도 같은 존재, 나는 그러한 그에게 나를 신뢰할 수 있는 재능을 꺼내보이고 싶었다.
   그는 나를 저기요, 를 대신하여 ‘형씨’ 라고 호칭을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으로 불러주면 더 좋았거늘, 처음은 어색하니 일단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아주 장난스레, 더 다가갈 수 있다면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 하고 갖은 망상을 심어보며 오랜 친구라 불리는 몽땅 연필을 손에 쥐어보았다. 기꺼이 말아놓은 4절 도회지를 펼쳐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팔레트도 완벽히 세팅, 준비는 언제나 익숙했다. 남의 집임에도, 왜일까. 정겨운 기류가 그와 나를 감싸 돌았다.

   “어떤 느낌을 원해요?”

   가만히 소파에 앉아 뚱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그래서인지, 눈살을 찌푸리며 마음대로 하라는 답에 입술을 깨문 채 웃음을 참으려 했을 지도 모른다. 이윽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원래의 표정을 유지했다. 그것은 너무도 느릿하고,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바늘 과도 같았다. 눈을 크게 떠보여야지, 그의 표정 변화를 뚜렷히 볼 수 있었다.  뭐랄까, 소박한 기적이 희망을 끌어들였다. 희망은 불안해하던 그를 멈추었고, 자세를 고정시켰다. 나는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조종하듯, 마치 꼭두각시가 되어 새하얀 도화지에 선과 선을 잇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찍은 점은 곧이어 곡선으로 넓게 퍼지고, 곡선과 곡선을 이어 자아낸 새로운 형태는 나를 어디론가 이끌어나갔다. 그것이, 그것이 나를 캄캄한 길로 인도하는 것조차 모르던 채.

   “아직 멀었어요?”

  그는 참으로 다급한 사람이었다. 나는 꽤나 손이 느렸다. 십여 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의 베이지색 스웨터를 본따 그리기에 바빴다. 색조차 입히지도 못했거늘, 그런 말을 꺼내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아아, 아마도 그럴 터다. 그는 숨이 붙어있고, 몸을 움직일 수 있고, 자세를 유지하지 못해 입술을 뻐끔일 수도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듯하나, 무릎 위에 얹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다리마저 이따금씩 위아래, 나를 놀리듯 바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속도를 높였다. 내 나름의 속도로 그를 잡아보려 해도, 그의 초조한 모습은 결국 제 눈엣가시로 남아 돌았다. 아아,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가만히 있으라는 말조차 소용없었나보다.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원인일까, 그는 제 말을 듣지 않았다. 되려 그림의 완성을 바라는 듯, 마른 침을 삼키며 식은땀을 흘리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아무리 눈살을 찌푸려 그를 유심히 살피고, 보이는 모습 그대로 도화지에 옮겨보아도 원하는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슬럼프가 아니었다. 아마 징크스일 거다. 벗어나오지 못하는 징크스, 그저 그리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도화지에 그이를 맡겼고, 제 손에서 희망을 바란 채 기적을 그렸다. 그의 모습 그대로 자화상을 그려보았다. 허나 미미하게 튀어나온 스웨터의 무늬, 삐죽 튀어나온 선, 반듯하지 못한 모양은 괴기스럽게 나를 골렸다. 어째 살아있는 사람을 그리는 거야? 본래 이러지 않았잖아. 비웃음치며, 제 귀에 속삭였다.
  오로지 시체를 골라 그려오던 주제에, 뒤늦게 살아있는 사람을 그리고 있는 거야?   
  속을 갉아먹은 악독한 소리, 스스로 자아내었던 소리. 듣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는 형형색색으로 어우러진 팔레트, 구석구석에 짜여진 물감이 있었다. 왜일까, 스케치는 끝나지 않았어. 붓을 들었다. 각각에 놓인 물감을 한 자리에 섞었다. 물은 적시지 않았다. 애시당초 내게 물통 따위는 필요 없었다. 스케치는 완성을 져버린 채, 연필을 놓았다. 얼핏 보면 그와 닮아빠진, 살아있기에 아름답지 못했던 자화상. 얼룩덜룩, 먹구름과도 비스무리한 색깔의 붓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연필로 더러워진 도화지 위에 색을 채웠다. 얼굴은 회색, 어깨는 그레이, 상체는 천장 위로 떠도는 쥐색, 하체는 시멘트색, 색을 입혔다. 안타깝게도 신발은 그리지 않았다. 그리기도 전에 감정은 이미 끝을 도달했다. 오로지 완성을 바라는 그의 모습을 감정에 담고도 남았기에. 그러하기에, 나는 그의 바람대로. 염원을 이룬 것처럼, 새까맣게 물든 도화지를 그의 앞에 보여주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난 원래 손이 느리거든.”

  당신은 꽤나 급한 사람이네요. 넘쳐 흐르던 한마디를 끊어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 그런가보다. 스스로 납득하고 말았으니까. 그는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옅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꽤 괜찮지 않아요?”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이 검게 물들어진 자화상, 그것이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사실조차 실감하지 못한 채. 이게 당신의 모습이에요, 초조함에 썩힌 당신의 모습. 그저 기뻐하기 그지없는 그의 앞에, 나는 환히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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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토, 나는 말라갈 거야. 힘없이 죽어가는 산세베리아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주일 전에 들었던 그의 말 때문이었다. 장난이라 단정 짓기에는, 어느 때보다도 한 층 내려앉은 그의 얼글이 머릿속을 스쳤고, 거짓말이라 믿기에는 스스로가 이미 그의 운명을 실감했다. 나 홀로만이 그의 짧은 운명줄을 수긍하려 했다. 처음부터 그는 내게 있어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 고장난 시계와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러니 그가 뱉었던 한 마디를 외면 했었다. 그리고 허풍을 떨었다. 거짓말을 할 시간이 있다면, 당장 학교에 오라고. 전부 너 때문에 일이 바빠졌다고. 뱉었던 거짓말은 반환점이 되어, 다시금 내게로 돌아왔다. 아무도 모르는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과 비례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울부짖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고, 몸 속에 잠긴 모든 물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무서웠고, 괴로웠다. 가슴을 찌르고 들어온 그의 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이 무서웠다. 그가 무서웠다. 그의 죽음이 무서웠다. 그가 죽을 까봐, 당장 눈앞에서 사라질 까봐, 도망치기에는 너무도 늦어버렸다.
  도망치기도 전에 멋대로 들어온 사랑 따위는 내 안에 잠복하고 있었다. 마치 기회를 엿보던 스파이처럼.

   “케이토, 왜 울고 있어?”

   그렇게 너 또한 마찬가지로,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특히 어린 아이처럼 그이로 인해 소나기를 흩뿌릴 즈음이면, 언제나 그이는 나를 가로막았다. 그의 앞에 감정을 숨기기 힘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눈가를 비비고, 눈물로 흠뻑 젖은 안경을 옷깃으로 닦아내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가라앉은 고개를 억지로 올려 그를 바라보자 하면, 옅게 웃음을 머금은 그를 바라보면 볼수록,
  아니, 어차피 이런 몸이었으니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던 그의 한 마디에 덜컥, 흔들리는 창문처럼 왈칵, 하고 흘러넘치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수치였다. 남자, 라는 이름의 자존심은 한없이 떨어져, 그에게 닿아지려 했다. 그와 나만이 남겨진 병실, 지금이라면 모든 것을 내치고 달아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그만큼이나 무력했고, 그를 바라볼 수 있는 힘조차 남아있지 못했다. 허나 그는 괜시리 교복 바지를 구기던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곁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꽉, 꽉 잡아버렸다. 그리고 확, 잡아당겼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케이토.”

   네가 왜 울고 있는지. 심히 불편하고도 남는 자세였다. 확실한 건 내가 그의 품에 안겼고, 그는 아이 달래듯 제 등을 다독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편히 자고 일어난 그의 앞에서. 이상해. 이상하다고 느껴야만 했다. 너무도 갑작스럽기에, 당장 떼어내도 별 이상한 일이 아니라 믿었다. 그래, 떼어내야지. 어린애 취급은 누구보다도, 그에게 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좁은 등 위로 얹어진 손을 스을, 풀어내려 다른 한 손을 침대 시트 위에 얹었다. 그리고 바삐 그에게서 거리를 두려 타이밍을 노리려 했다. …왜일까, 그러기도 전에 풋, 조그마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는 그의 웃음 소리였다.

   “그래도, 너한테 이런 면도 다 있었구나.”  
  “괜찮아, 울어도 돼. 나는 괜찮으니까.”

   말을 이으며, 그는 나의 등을 조용히 다독여주었다. 곤히 잠든 아이를 다독이는 어머니처럼, 따스한 목소리로, 따스한 품을 등 져가며 나를 감싸 안았다. 갑작스레 고장난 선은 그의 등을 붙잡았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세게 붙잡았다. 그이로 인해 나의 모든 행동이 망가졌다. 그의 말에 잠깐 멈추었던 나의 눈물이 두루두루 그의 연푸른 옷을 적시고, 약품 섞인 그의 어지러운 향은 나를 목놓아 울렸다. 차음으로 그의 앞에 감정을 쏟아부었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이만의 애틋하고도, 따뜻하기 그지없는 온기가 울음 소리로 가득한 병실을 맴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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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은 언제나 평범하고, 언제부턴가 잊을 수 없는 피날레와 함께 매듭을 짓는다. 그렇게 생각한 건 사카타 긴토키의 죽음이 조그마한 땅을 울렸을 때일 터다.  
  그의 죽음은 허무했다. 허무함을 떠나, 텅 비어지듯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사카타 긴토키의 소식에 모든 사람들은 쏜살같이 달려왔다. 마치 대진표를 보기 위해 달려온 싸움꾼처럼, 한 치의 망설임조차 거둔 채 그에게로 걸음을 놀리지 않던가. 허나 이들이 달려오기 전, 상황은 이미 한계를 뛰어 넘었다. 죽기 전까지의 그는 한 마리의 들짐승과도 같았다. 고작 장난삼아 뱉어본 협박 하나에 그리 매달릴 줄은 어느 누가 알았으랴. 다시 그려보자니,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나의 협박은 아마 이러했을 거다.  
  ㅡ카부키쵸는 곧 하루사메의 서식지가 될 거야. 나는 기억했다. 사소하고, 시답잖다고 여긴 한 마디에 검을 붙잡고, 무섭게 달려들었다. 나를 밀어냈다. 마치 멧돼지 하나가 우람한 나무를 꺾으려는 듯, 자신의 터를 지키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의 모습을 부정했지만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라 과거를 되새기기에는 두 걸음이나 늦어졌다. 애당초 어리석은 것은 나였다. 나는 그를 죽였다. 사카타 긴토키는 나의 모든 것을 거부했다. 우스꽝스러운 이유는 나를 뒤집고, 숨을 조였다.  
  점차 그들의 통곡 앞에 등을 돌렸다. 도망쳤다, 고 해야 옳겠지. 평소와는 달리 그럴듯하게 나아가야 할 것을, 걸음은 뒤를 향했다. 그렇게 뒤로, 뒤로… 좁은 보폭이 어느 순간 그와의 거리처럼 넓어지고 말았다. 느릿한 걸음이 갈피를 잡지 못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뛰었다. 숨이 가빠지지 않았다. 그러니 지리조차 알 터가 없는, 사람이 살지 않는 어딘가로 달려가려 했다. 그의 죽음과 살인의 범인을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우고 싶었다. 허나 무작정 지우려 해도,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내부의 굴뚝의 검은 연기는 싫은 것들을 꺼내 올렸다. 그리고 높고 높은 파도처럼 나를 덮었다. 더이상 그 무엇도 나를 절망의 품으로 인도하려 손을 내밀었을 때, 그들을 제치고 나의 주변을 빙빙 맴도는 어지러운 것이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결코 장난 따위가 아니였다.

  ‘나는 너를 받아들일 수 없어.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야.’  
  ‘카무이, 유감스럽지만 남자와 남자는 이루어질 수 없어.’  
  ‘대신 하나만 약속할게.’

  만일 내가 너를 증오하게 되더라도, 내 흔적은 너를 찾아 붙잡을 거야. 반드시.
   연푸른 색과 하얀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나비. 이는 내게 인사를 하듯, 어지러이 제 주변을 허우적거렸다. 그야말로 사카타 긴토키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뱉었던 말의 의미는 착시현상(나비의 뒤를 따르는 오로라)처럼 보이는 환상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다시 한 번,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렸다.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범인은 양 손을 타고 진득하게 흐르는 붉은 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덧없는 자태를 뽐내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푸르고, 흰색을 띄운 호랑나비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괴롭고, 버거워서, 그라는 이름의 추억이 나의 몸을 억누르고 있었다. 정녕 저 나비가 그이라면, 거짓말이라며 들이닥친 현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아니라며 고개를 세게 저어야만 했다. 허나 푸르고, 뚜렷하지 못한 나비는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 피하지 않았다. 억지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듯이, 나와의 거리를 가까이 했다. 그리소 느릿하게 나의 눈동자 위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이전과 별 다를 것 없는 그의 모습처럼, 울지마. 라며 울보 취급하고, 어쩔 수없이 달래어주는 것처럼.

  “왜 나타난 거야?”

  울보 취급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나는 울보가 아니였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을 알려준 사람은 그이였다. 고작 쉴 새 없이 날갯짓을 보이며 눈엣가시로 보이는 작고 약한 생명체에게 위로 받고픈 목적은 아니란 말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허구로만 가득한 상황을 알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있는 총 지식을 동원해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고장난 로봇이 된 것처럼.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죽이고, 죽였던 로봇이 그를 만나 점점 망가지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더는 고칠 수 없을 불량품이 되었다. 심장이 북치듯 뛰어 오르고, 새로운 감정이라는 물건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을렁거리는 가슴에 쓰라리는 것은 아프다는 감정을 표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쌓여온 감정은 액체가 되어 눈동자에서 장맛비를 떨구고 있었다. 눈물이라는 것이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로봇은 괴로워했다. 바야흐로, 나는 그 괴로움에 버거워 떨군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어째서인지, 눈동자에 앉은 나비의 모습이 가려져야 할 것을, 훤히 드러나는 것처럼 비추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외면하려 하니, 어느덧 내 눈앞에는 하얀 오로라를 띄운 그의 모습이 눈을 마주하며 웃고 있었다. 환히 웃고 있는 얼굴은 내게 말해주었다. 거짓말이 아니야, 허구 따위가 아닌 그가 살아있을 때처럼.
  눈동자 위에 가라앉은 푸르고, 투명한 나비는 아무리 온 몸으로 실감하려 해도 실감할 수 없었다. 얇은 폭포처럼 내리는 내 눈물에 휩쓸려 간 것처럼, 푸르고 하얗게 조화를 이루던 나비는 어느덧 돌아올 수 없는 곳을 향해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환영마저 눈에 녹아 사그라지듯, 흔적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남은 것은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었던 환희, 그는 나를 버리지 않았어. 라는 망상에 버거운 웃음. 그리고,

  “아아, 이게 말로만 듣던 하루사메의 거물이던가? 토시.”  
  “아니죠, 곤도 씨. 하루사메의 거물은 너무 거창하잖아?”

  사카타 긴토키를 살해한 간 부은 괴물이지. 그가 웃던 자리에는 세상 모든 분노를 이끈 누군가가 있었다. 사뭇 다른 분위기의 그는 내게 검을 지켜 들었다. 드리우는 그림자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눈물과 함께 마지막을 가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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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치. 어릴 때의 그는 언제나 나의 이름을 밥먹듯이 부르고는 했다. 특히 단 둘이서만 있을 때에는, 지겨울 정도로 부르기에 바빴었다. 처음은 왜? 라고 내게 답을 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아니 저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는 부끄럼쟁이나 새침데기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는 나의 이름을 부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딴청을 피웠다. 내 이름 한 번, 독서 한 번. 처음은 그이만의 장난이라 여기며 넘어 갔었다. 허나 이름을 부르는 횟수가 가면 갈수록 늘어나고, 이제는 다른 이들이 있는 앞에서도 모르는 척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어물쩡한 행동에 화가 났다. 라기 보다는 심술이 생겼다.
  그가 부리는 장난만큼, 나도 나만의 장난으로 대응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가 내 이름을 부르고, 곧장 외면하듯 마찬가지로 같은 방법으로 그를 골렸다. 케이토, 그의 이름을 부르다 반응이 오면 획 피해버리거나, 조금 나아가 아예 그이와 함께 있었던 장소를 벗어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분명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었다. 자칫 나의 장난이 그에게 상처를 입힐까 불안했고, 그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나, 싶어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의 장난이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처럼, 그의 눈치를 살피며 글씨와 글씨로 빽빽한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그에게 조용히 다가서려 했다. 허나 길고 긴 나의 장난을 멈추고 보니, 다시금 그는 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그에게 다른 대답을 꺼내보였다.

  “에이치.”
  “응, 말해.”

  또다시 모르는 척은 하지 말아줘. 재미라고 느꼈던 그의 장난은 어느덧 시덥잖게 느껴지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고, 모르는 척 외면하는 모든 행동은 그저 (나도 같은 나이지만) 어린 아이의 수줍음 때문이라 자각하고 싶었다.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쉬웠다면, 그에게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을 거다. 허나 나는 그리 단순하지 못했다. 아무리 솔직하지 못한 그이더라도, 감정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법이기에. 결국 그에게 화를 내었다. 정확히는 분노가 아닌, 짜증을 호소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와 나는 서로 눈을 마주했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었고, 나는 웃어보였다. 이윽고 나는 입을 열었다. 이제 한계야. 친구이기에 뱉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원래부터 조용했다. 그가 말을 늘어놓는 순간 상황은 급속히 바뀌겠지, 허나 지금은 아니였다. 쥐도 새도 잠든, 고요하디 고요한, 도둑이 들어와도 모를 기류가 주변을 겉돌았다. 그는 어찌나 놀랐던지, 안경조차 제 위치를 찾지 못해 이따금 삐뚤어져 있었다. 이상도 하지, 그리 놀라게 하던 말이었나. 되려 놀란 쪽은 내 쪽이었다. 겉으로 튀어나오는 의문을 넣은 채, 그의 기울어진 안경을 올려주기 위해 손을 올렸다. 나의 손은 그의 안경을 잡았다. 그렇게 살짝 올려주려 하니, 그가 애매한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나, 나… 에이치를 지킬 거…다.”

  평소와는 다른 어색한 말투, 죽을 것 같이 파르르 떠는 입술. 동작이 멈추었다. 그는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고, 나마저 그와 함께 시간이 멈추듯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마치 어느 누군가가 초능력을 사용한 것처럼, 우리는 행동을 멈추었다. 수없이 부푸는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애당초 그가 뱉은 지킨다, 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급히 설명하려 한들, 나는 영원히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는 멈추어진 시간을 부수고, 확 붉어진 얼굴로 허둥지둥 자신의 말을 이해시키려 했다. 내 몸을 걱정해서 했던 말이라며, 전부 잊어버리라며, 괜한 오해는 말라는 둥의 말을 늘이며 안경 위에 얹었던 제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더니,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허나 이것이 오해라 불려야 한다면,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으로 채워진 나의 표정은 결코 아니리라 단정 지을거다.

  “정말, 정말이야?”
  “그렇다면 케이토는 내 하나뿐인 기사인거네?”  
  “내가 오해라고 했…… 하아, 그래. 맹세하지.”

  소용없는 짓이야, 라며 너를 밀어내기엔,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아도, 조금이나마 그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가볍게 떠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구름처럼 두둥실 뜨는 기분을 이어받은 스킨십. 허나 분명 놀라 도망칠 것 같았던 그는 웃으며 제 손을 맞잡아주었다.

  “이건 케이토와의 맹세의 증표.” 
  “생각보다 단순하네.”  
  “혹시 다른 걸 원하는 거야?”
  “…설마.”

  우리들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앞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약속임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발버둥치리라. 텅 빈 허공, 도무지 닿지 않는 하늘에게 맹세를 표했다.

Posted by San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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