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보로, 저의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아니, 들을 수 없었다. 들린다면, 귓가를 맴돈다면 귀를 막아서라도 당신을 차단할 거다. 목소리뿐만이 아닌 그의 얼굴, 행위, 눈에 보이는 그의 심리조차도 그저 ‘그’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기울이는 세상마저 이제는 완전히 등지려 한다.
…태양은 중천으로 떴거늘, 나를 비추는 등불은 그 어디에도 없었기에, 아니. 나에게 있어 그는 태양과도 같은 존재다. 누군가에게 미래를, 누군가에게는 따스한 손길로 새로운 길을 인도하는 그는 태양, 정 반대인 나의 존재는 흡사 달과도 같은 존재이었기에 지금의 태양을 감히 눈뜨고 마주할 수 없는 노릇이라는 거다. 이러한 나를 당신은 무어라 응해줄까. 아주 먼 훗날, 그 때처럼. …늘 익숙한 미소로, 그리 온순한 손길로 내게.
“당신은 참 어리석군요.”
세상 모든 까마귀도 그의 말 한 마디면 움직임이 저절로 멈춰질 것이다. 그렇게, 그의 어처구니없는 한 마디로 사악한 흉수를 이끄는 당신이 눈부셨다. 그가 자신의 품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아니라면 칠흑으로 매꾸어진 어둠을 자신… 그이만의 희미한 빛으로, 맞닿으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그의 빛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그의 나긋한 말이 좋아서, 황홀했던 나머지 절로 입꼬리를 올리고자 하면 본인도 느른히 웃으며, 웃으니까 더 못생겼어요. 라 장난삼아 농담 따먹기를 시도하는 그라는 자체가, ……?
……애초에 난 어떠한 이유로 그를 외면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심지어, 나마저도 이리 가볍게 떠올리는 걸 보아하니 정작 ‘하늘의 사자’라는 익숙한 존재도 날개 잃은 까마귀와 함께 타락하는 걸지도 모르겠지. 허나 분명한 것은 반드시 나는 당신에게서 등을 돌려야만 한다. 그것뿐이었기에 깃들어있는 의미조차 파악할 수 없었으리라.
그이, 당신. 요시다 쇼요라는 존재. 하물며 존재할 수 없는 존재. 천하의 대역죄인… 그러한 존재를 사랑해버린 나이기에 당신을 외면하지 아니하는가 싶다.
“인간의 감정 앞에서 무너지는 당신은 더더욱 애석해.”
당신, 그의 목소리는 당연하다시피 하늘에 닿을 수 없으랴. 그리 믿었거늘, 정작 그이의 앞에 수족이 묶여 발버둥치는 자신은 변명할 기미를 찾아 해매고 만다. 쾌쾌한 공기가 마다하지 않고 흐르는 이곳은 야수의 방인가. 아아, 아니라면 대체 어디….
상황을 정리할 시간조차 없었다. 아무리 무얼 한들, 무력으로 묶이고 만 사슬을 풀 수 있다고 한들 어설픈 낯짝을 바라보며 웃는 당신의 앞에서는 굴복하는 것 밖에 방법은 없었다. 아니,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 정해놓은 ‘규칙’일지도.
“어째서, 저를….”
“오보로는 너무 물러터졌어요.”
자신만의 검을 휘두르면서까지 울부짖는 자들에게는 증오를, 저의 앞에서 가만히 땅에 얼굴을 내리박는 차별행위는 대체 누가 가르쳐 준 방식이던지, …그래. 그의 농락이었다. 나의 심기를 발로 차듯이 건드리는 조롱. 익숙한 낯짝으로 묶여진 주위를 어지러이 맴도는 그의 행동을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임무. 멋대로 다짐한 나의 소중한 임무였다. …불어오는 당신의 기운에 오한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녕, 당신. …요시다 쇼요이었기에 기꺼이 따르고마리다.
당신을 놓아야한다는 가벼운 소원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이의 앞에서 산산조각, 마치 어디에도 없다는 듯이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저만치에 서 있던 그가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던 당신이 멀어지다, 눈을 뜨니 마술처럼 나의 코앞에 망연히 존재하는 그의 모습은 당황스러운 행동이었다. 당황도 잠시, 틈을 내어줄 새도 아니하고 기꺼이 그 고운 손을 나의 볼에 조용히 얹어주었다. 땅에서 느껴지는 온기인가, 라더니 결국은 그의 따스한 손길에 방심하고 말았다.
“그래도 전 아이러니하게도 물러터진 오보로를….”
“…쇼요.”
그는 이렇게나 따스한데, 그 온기를 받들이지 못해 그저 그이의 체온을 몸으로 실감한다. 감히 고귀한 분, 나에게는 고귀한 분이니 차마 고개를 들고, 당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할 터.
“오보로가 저의 곁에 있다는 것에,”
“쇼요 님.”
“행복을 느낀답니다.”
아아, 오늘도 아름다운 당신이여. ‘제자’라는 겉치레에 둘러싸인 망측한 당신이여. 감히 부정할 수 없는 당신은 당연한 죄인입니다. 신을 거역하고, 하늘을 거역하고, 만물을 내던진 당신은 스스로 그 가녀린 손으로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아마 저는 당신이 만든 세상에 발을 들이지 못했기에, 당신을. ……당신을.
…아아, 여전히도 당신의 손은 여느 때나, 그러하듯이. …온기를 뒤집어쓴 한기는 저를 지옥으로 밀어 넣습니다. 지옥으로 밀어넣은 자는 당신의 그 손, 아니. 당신… 요시다 쇼요라는 자체. 이윽고 저는 실감하고 맙니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이미 요시다 쇼요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맙니다.
그렇기에 유감스럽게도 저는 당신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행복’이라는 말을 내뱉은 것과 동시에 당신은 허상, 영원한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저를 묶어놓은 사슬이 풀렸습니다. 아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라져서는… 이제 아무도 모르는 칠흑이, 저만의 공간이,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이제 당신을 놓아….”
전해질 수 없던 감촉이 내게로 느껴진다. 그래, 이제 곧 당신을 놓아야만 하는 신호가 아니할까. 뒤늦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후회가 현실을 고한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현실은 꿈의 일부분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아까 그의 행동이 확실하게 알려주었을 터, 헌데 죽은 이의 온기를 잊지 못해 망가진다. 나를 조종하던 심장은 정상을 어긋나 삐걱, 삐걱. 빠르게 움직인다. 북을 두드리듯 불안정하게 뛰는 이 소리를 제지할 수 없어 기어코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서는 멈춰라, 멈춰라. 하고 미친 듯이 주문을 걸어본다. 나의 신체는 나만의 것이라고는 하나, 도저히 멈추지 않는다. 급박하게 움직이는 심장의 두근거림에 숨이 가빠올 정도로나 괴롭다.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을 정도로, 뛰어온다.
“…줄 수 없으리다.”
요란히 떠드는 이것을 당신은 「」이라고 하였다. 그 공백에 들어갈 단어는 유감스럽게도 쉽게 떠올리지 못해 발버둥친다. 그대로 울부짖는다. 발악한다. 짐승의 외침이었다. 불과 몇여분만에 사라진 허상을 멋대로 떠올린다.
그의 부름에 얼굴을 들지 아니하고 그를 부정해버린 사실을 부정한다. 참으로 비통했다. 이 슬픔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것이었기에, 아슬아슬하게 고통을 억누른다.
나의 칠흑에, 나의 밤에, 나의 불투명한 배경에 몸을 숨겨버린 채.
*
오늘도 까마귀는 쉴 새 없이 울부짖습니다. 조심스레 서풍이 불고, 동에서는 보름달이 고개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물며 태양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냉혹히 숨을 죽입니다. 이제 태양은 영원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겁니다. 이 곳은 태양도, 햇빛도, 그 어느 스포트라이트조차 시들어버린 밤의 세계. 저만의 공간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세계에 아주 잠깐, 저의 공간에 발을 들인 당신은 제게 빛을 남기고 조용히 떠나셨습니다.
…저는 떠난 당신이 미웠습니다.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가증스러운 당신을 차마 그리 부르지 못해 더욱이나, 그러한 당신이 증오스러운 나머지 이리저리 구석을 찾아 당신을 피하고, 피했건만. 실은 아니었습니다. 전부 거짓이었습니다. 저는 그 반대로 당신에게 다가가 애정을… 감히 건드릴 수도 없는 당신에게 「」를 표하였던 거겠지요.
뒤틀려버린 무수한 말의 씨앗들 중에서도 여전히 헤매고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당신과 함께 하였던 과거의 조각을 찾아 지워진 공백에 넣을 단어를 찾아 오늘도 길을 찾아 나섭니다. 당신이 없는 길을 걸어봅니다. 사라진 흔적을 억지로라도 되새기면서까지, 지독하게 길잃은 어린아이처럼 서성거립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내게 펼쳐진 길이라곤 이제 종막을 고하는 길일뿐인데. 그래, 당신을 잊어야만 하는 수라의 길이 나의 앞에 펼쳐지고 있거늘.
무수하고도 깊은 새카만 영혼이 인도하는 어두컴컴한 그 길을 걸어봅니다. 부디 저의 모습을 눈을 감아보고, 귀를 막고, 서서히 잊어주셨으면 좋으련만. 아니, 애초에 당신은 저를 그저 눈엣가시로 밖에 여기고 있겠지요. 아무렇지 않게 내가 아닌 그 아이들을…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그저. 태양을 받쳐주는 그 하늘에서, 나의 반대편의 세상에서 매일 웃어주셨으면 하는 따름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웃고 있을법한 당신을 거부하는 나를 위해서라도.
“선생님께, 안부 전해라.”
우위에서 내려다보는 만월은 그리 아름답지 못합니다. 차마 빛을 방출해내서라도 자신의 허점을 덮으려는 거겠지요. 아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라는 빛을 가로채고 싶었습니다. 저의 허점은 당신의 예상을 초월하여, 수없이 놓인 허점이 두려워 울부짖어봅니다.
……아아, 쇼요. 나의 쇼요. 저만의 쇼요여. 당신의 빛이 그리웠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구석에 비추는 빛을 찾으면 그것이, 당신이 찾아온 흔적이라 느껴버리고, 실감하고, 알아차리면 그 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당신이 남겨준 빛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검 따위 들 수 없는 한 사무라이의 발언에 모습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영원히 지킬 수 없는 것들을 지켜가는 그 사무라이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뻔뻔히 들어올린 태연한 낯짝으로 당신의 이름을 울부짖습니다. 당신을 뒤로 해서 없는 존재들을 만들어가면서까지, 말라비틀어진 땅에 물을 심어가며 당신의 세상을 뒤이어 꾸려가려 합니다. 참으로 그 스승에 그 제자나, 유치한 꼴을 보이기 짝이 없더군요.
쇼요, 당신이라는 존재는 대체 언제 저의 머릿속에서 맴도실 생각인 겁니까. 먼 훗날에 당신의 싸늘한 주검을 외면해버려도 실제는, 꿈은 언제나 일직선을 향해… 지우려 한들 지울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는 당신의 제자가 아닌 바로 저였단 말입니다. 헌데 당신의 선명한 웃음은 어째서 내가 아닌 그들에게, 그들에게 향한 겁니까. 그래, 확실히 나는 질투를 했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끈질기게 그들에게 색다른 질투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요. 도태를 발판삼아 싸그리 잊으려 했던 당신, 당신의 제자들. 허나 이제는 나의 뇌리를 꽂은 비수의 파편, 잊지 못해 불러보는 진혼곡.
“…….”
어떠한 검이 나의 등을 내리꽂음과 동시에 떠올려보는 과거의 당신과 나의 모습.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기억에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아아, 꼴사나운 태양이 몸을 달군다. 지긋지긋한 싸움의 승자는, 아니. 의미없는 싸움의 패배를 경험했다. 쓰디쓴 통증이 심장을 파고들 것 같은 불안에 조용히 숨을 돌린다.
처음, 처음이자 두 번째 결전의 종지부는 오늘로써 마무리를 지은 거다.
…새어오르는 기분나쁜 잡념에 고개를 들어 태양을 직시했다. 여전히도 따가운 쏜살이 당신의 눈빛같아 애매함을 안겨주고 만다. 헌데, 왜. 왜?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가까이에 당신과 동등한 존재, 아니.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얼마만인가. 눈이 부시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당신의 빛이다. 이토록이나 찬란한 빛을 왜 나는 외면하고 있었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았더라면, 얼마나 애틋한지 알았더라면 나는 이리도 애석하게 방황할 필요는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그렇게 이 따스한 햇살에 눈을 감으며 당신을 느껴본다. 비틀어진 나의 공간이 천천히 내리쬐는 빛으로 채워져가는 광경을 실감하며 지긋이 눈을 감는다. 그리고서는 나의 앞에 조용히 웃는 당신에게 손을 뻗어본다. 조심스레 말을 걸어본다.
“쇼요 님.”
아무래도 저는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