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ㅌㅇㄱ

2017. 1. 1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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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텐쇼인 에이치는 언제나 승리를 추구했다. 그에게 있어 옳고그름 따위는 없었다. 자기 멋대로, 이기심대로, 선택의 걸림길에 있다면 두 말 없이 YES를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승리를 위해 뒤따르는 신하와도 같은 존재였고, 텐쇼인 에이치라는 이름의 정점이 무너지지 않게끔, 다른 이가 차지할 수 없게끔 제지를 돕는 그의 지원군이기도 했다. 다른 말로 취급하자면, 스파이… 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별명이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주변에서 오는 질문은 자그마치 지옥에 불과했다.

  기분은 어때?
  그런 녀석의 옆에 있으니까 좋은가봐?
  뒤따라 권력도 휘두를 수 있고, 좋겠네.
  나도 한 번 그 사람의 곁에 있어보고 싶어.

  질문에서 시작된 말 하나는 곧이어 바램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허나 그들의 쓰잘데기 없는 바램은 그에게 들리지 않았다. 애당초 그는 남들에게 잘 보여지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이를 향한 질문은 역으로 돌고, 돌아 나를 향해 꽂아 내릴 뿐이었다.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나에 대한 질문이 아니더라도, 그를 위한 질문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그렇듯 나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하고 만다.
  그것은 모두 거짓말로 가득 매워진 말이지만 말이다.

  “그냥 그렇지, 뭐.”

  어차피 소꿉친구이기도 하니까, 무난한 정도야. 그렇게 지어낸 허구는 나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잠들 것이고, 그의 앞에 밝혀질 일은 없을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같잖은 질문을 받을 때 즈음이면, 그는 언제나 나의 손에 닿지 않는 장소에 머물러 있었고, 그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행동 자체가 제 몫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야만 그의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말한다.

  또 가는 거야?
  지겹지도 않아? 매일 가는것도 힘들텐데…
  그 사람이 좋기 좋지, 아무리 그래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뒷담은 나의 지옥이었고, 어느덧 나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도망쳤다. 그들을 뿌리치고,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최대한의 속도를 높여, 발을 놀렸다. 그렇게 뛰고, 뛰었다. 불쾌하게도, 그를 향한 비난은 이명이 되어 나의 귓전을 맴돌았다. 마치 밤마다 시끄러이 울리는 모기처럼, 나를 쫓아오는 죄악의 무게처럼, 나를 괴롭혔다. 그래, 이질감이 들었다. 수없이 몰려오는 이질감은 나의 몸을 잡아 당기고, 그의 뒤를 따른 이유만의 죄악은 나의 목을 잡아 올렸다. 아무리 도망치고, 달아나도, 그것은 마치 데자뷰처럼 또다시 쫓아오고 말았다. 지금도, 그렇게, 나는 허우적거린다. 듣고 싶지 않은 그의 이야기를 억지로 들어가며, 고막에 꾸역꾸역 넣어가며, 오늘도 여전히 ‘그곳’을 향해 아이처럼 달려가본다.
  그리 도착하면, 어제와 변함없는 그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메스꺼운 약품 냄새로 가득한 병실 아래, 하늘의 색을 빼닮은 병원복 차림의 그가 나를 향해 웃는다. 그리고,

  “어서와, 케이토.”

  고르지 못한 숨을 다스리던 나를 양 손으로 와락 끌어안는다. 그의 품 하나에 이명이 사그러지고, 눈이 녹듯 천천히 지워져갔다. 그래, 그는 그냥 그런 존재일 리가 없었다. 나는 그가 필요했다.
  오늘도, 내일도, 늘 그렇듯 그의 구원을 받으며 하루를 지탱해야만 했기에, 그가 없는 나날은 상상할 수 없었기에. 따스한 그의 품에 눈을 감았다. 이것이 나의 애처로운 구원이었다.
Posted by San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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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나타 쇼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를 자그마치 ‘태엽감기’ 라고 정의했다. 태엽이 감겨지지 않은 그이는 그저 남들과 별 다를 것없는 고등학생이기 때문이었고, 제 스스로가 끼익, 끼이익. 가벼웠던 태엽을 무거이 돌리게 되는 순간 그는 한 순간 코트를 정점하는 고등학생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무거운 깃털처럼, 그에게 있어 태엽은 살아 숨쉬는 존재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었다. 허나 그러는 때면 그의 주변에 몰려드는 화사한 빛에 곧장 도망치고 있었다. 언제나 그의 옆은 사람과 사람들로 가득 매워져 있었고, 희망을 찾아 틈과 틈 사이에 억지로 비집으려 하면 늘 그렇듯 그의 실루엣은 어디에서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겨진 것은 그에게 없는 잿빛 만이 나의 앞을 뒤덮었고, 차갑게 감싸고 있었다. 그래, 지금이야 말하자면, 그가 부러웠다. 그렇다고 가까워질 수는 없다. 네가 모두와 마주하는 태양이라면, 나는 고독하기 짝없는 달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이도 나도 서로 맞물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건, 그의 곁을 찬란하게 돋우고 있던 기사의 보호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애시당초 이름은 기억할까,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이름을 불렀던 적이 있더라도…… 아아, 절대 없었겠지. 당연스럽게도 나는 그에게 비아냥거렸고, 그의 심부를 푹, 푹, 몇 번이고 찌르려 달려들기에 바빴었다. 그저 단순히 제왕, 이라는 한 마디에 움푹 들어간 홈처럼 억지로 과거를 묻어두려 하는 그의 모습이 우스울 따름이었고, 그러한 그의 모습을 제 스스로 만족했다. 나는 그랬다.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을 언젠가 망가뜨릴 수 있더라면, 그토록 바라던 태양을 바로, 제 앞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소소한 바램을 양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버텼다. 기다렸다. 제왕의 자리를 노리려 틈을 엿보았다.그도 그럴것이, 제왕의 곁에는 볼품없는 태양이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그 이유 하나가 내 삶의 파편 하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신의 콧방귀 하나라 여겨도 마땅치 못할 기적이었다. 어찌저찌 기회는 잡을 수 있었다. 제왕과의 말다툼은 이제 질릴 법했다. 웬일인지 그는 체육관 구석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신나게 튕기던 배구공을 양 손으로 붙잡고,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허나 자옥한 주홍빛의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자츰 가라앉아 있었고, 멀리서는 천장을 넋놓아 바라보는 것처럼 보여도, 잔잔하게 부는 바람은 그게 아니야. 라며 나를 부정했다. 용기를 내어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끔, 조금씩, 조금씩 그에게로 걸음을 놀렸다. 허나 이전까지만 해도 환히 웃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배구공을 양 손으로 꽉 잡은 채, 울고 있었다. ──뚝, 뚜둑, 뚝, 그의 눈물방울은 흐르고 흘러 툭, 투둑, 배구공을 적시고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 없이 그저 뚝, 투둑, 후두둑.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그의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에게 다시금, 성큼성큼, 다가가보았다. 그리고 네 앞에 섰다. 단숨에 느껴지는 기척에도 그는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여전히 너는 붉어진 눈시울 아래로, 가엾은 빗줄기를 내보낼 뿐이었다. …그 때였다.

  “츠키시마.”

  나지막이 나의 이름을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그것은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되어 돌아왔다. 츠키시마, 츠키시마, 츠키시마… 결코 꿈이 아니었다. 그는 나의 이름을 옹알 걸렸고, 지겨울 정도로 그의 목소리로 울리는 체육관은 오늘따라 더더욱 크게 볼륨을 높이고 있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싫다고 하기에는 그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유를 묻기에는, 별 거 아닌 사연임이라 여겼다.

  “나, 카게야마하고 싸웠어.”

  물론, 내 예상은 빗나갈 리가 없었다. 허나 이리도 서글피 울고 있는 그가 있었고, 그의 곁에 있어야만 하는 제왕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는 싸움의 증거였다. 얼마만큼 영향력이 큰 다툼인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애시당초 그들의 싸움에 흥미를 갖는 것도 아니었고, 항상 있어야만 하는 일이라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나는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도 몰랐다. 감정조차 없는 장대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허나 오늘도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러한 그를.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심스레.

  “너무 단순하잖아.”

  괜찮아, 다 잊어버려. 라며 그의 앞에 앉아, 망설임조차 없이 흐르던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지겹게, 지겹게 반복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러니까 애처럼 울지마. 그를 향해 옅게도 웃어보였다. …아아, 도대체 어느 누가 다정한 위로를 받고도 눈물을 그칠까. 그의 소나기가 쉴 새 없이 쏟아 흐르고, 서럽게 울려퍼지는 그의 흐느낌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를 위로했다. 그의 소리를 꾹꾹 들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전부였다. 누구처럼 그를 안을 수도 없었고, 누구처럼 너의 모든 것을 눈앞에서 담아낼 수 없었다. 누구처럼 그러기에는 그가 오늘처럼 서글피 울 것만 같아 두려웠고, 또다시 그의 주변을 겉돌다 이내 도망치고 마는 내 자신이 역겨웠다. 억울하게도, 태양이라는 그의 이름 아래 달이라는 작자를 억지로 붙일 수 없으니까. 그렇게, 다시금, 울지마. 라며 중얼거린 채 조그맣게 웃어보였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보여야만 했던 마지막 인사였다.

 
Posted by San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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