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만남은 이러했다. 굳게 닫힌 눈동자를 억지로 열게 하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상하고, 너무도 다정하여 꼭 어느 곳에서든 성공을 쟁취할 수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하찮고, 민폐로 가득 뭉친 내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아마 반대였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무척이나 좋았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리 따스한 그에게 허점이 있더라면, 누구보다도 크게 떠보였던 눈조차 그이의 곁을 떠났다는 것. 가엾게도, 그 이유 하나만으로 토해낼 수 없는 고통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다가갔다고 한들, 그것은 아주 잠깐 사소하게 일어났을 뿐이지만 말이다.
  오늘은 그의 자화상을 그리기로 했다. 대놓고 그의 집에 멋대로 발을 들였고, 무작정 그에게 들이댔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흔쾌히, 까지는 아니나 공포에 몸부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여전히 구원을 바란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우적거리는 미운 오리와도 같은 존재, 나는 그러한 그에게 나를 신뢰할 수 있는 재능을 꺼내보이고 싶었다.
   그는 나를 저기요, 를 대신하여 ‘형씨’ 라고 호칭을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으로 불러주면 더 좋았거늘, 처음은 어색하니 일단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아주 장난스레, 더 다가갈 수 있다면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 하고 갖은 망상을 심어보며 오랜 친구라 불리는 몽땅 연필을 손에 쥐어보았다. 기꺼이 말아놓은 4절 도회지를 펼쳐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팔레트도 완벽히 세팅, 준비는 언제나 익숙했다. 남의 집임에도, 왜일까. 정겨운 기류가 그와 나를 감싸 돌았다.

   “어떤 느낌을 원해요?”

   가만히 소파에 앉아 뚱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그래서인지, 눈살을 찌푸리며 마음대로 하라는 답에 입술을 깨문 채 웃음을 참으려 했을 지도 모른다. 이윽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원래의 표정을 유지했다. 그것은 너무도 느릿하고,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바늘 과도 같았다. 눈을 크게 떠보여야지, 그의 표정 변화를 뚜렷히 볼 수 있었다.  뭐랄까, 소박한 기적이 희망을 끌어들였다. 희망은 불안해하던 그를 멈추었고, 자세를 고정시켰다. 나는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조종하듯, 마치 꼭두각시가 되어 새하얀 도화지에 선과 선을 잇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찍은 점은 곧이어 곡선으로 넓게 퍼지고, 곡선과 곡선을 이어 자아낸 새로운 형태는 나를 어디론가 이끌어나갔다. 그것이, 그것이 나를 캄캄한 길로 인도하는 것조차 모르던 채.

   “아직 멀었어요?”

  그는 참으로 다급한 사람이었다. 나는 꽤나 손이 느렸다. 십여 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의 베이지색 스웨터를 본따 그리기에 바빴다. 색조차 입히지도 못했거늘, 그런 말을 꺼내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아아, 아마도 그럴 터다. 그는 숨이 붙어있고, 몸을 움직일 수 있고, 자세를 유지하지 못해 입술을 뻐끔일 수도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듯하나, 무릎 위에 얹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다리마저 이따금씩 위아래, 나를 놀리듯 바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속도를 높였다. 내 나름의 속도로 그를 잡아보려 해도, 그의 초조한 모습은 결국 제 눈엣가시로 남아 돌았다. 아아,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가만히 있으라는 말조차 소용없었나보다.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원인일까, 그는 제 말을 듣지 않았다. 되려 그림의 완성을 바라는 듯, 마른 침을 삼키며 식은땀을 흘리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아무리 눈살을 찌푸려 그를 유심히 살피고, 보이는 모습 그대로 도화지에 옮겨보아도 원하는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슬럼프가 아니었다. 아마 징크스일 거다. 벗어나오지 못하는 징크스, 그저 그리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도화지에 그이를 맡겼고, 제 손에서 희망을 바란 채 기적을 그렸다. 그의 모습 그대로 자화상을 그려보았다. 허나 미미하게 튀어나온 스웨터의 무늬, 삐죽 튀어나온 선, 반듯하지 못한 모양은 괴기스럽게 나를 골렸다. 어째 살아있는 사람을 그리는 거야? 본래 이러지 않았잖아. 비웃음치며, 제 귀에 속삭였다.
  오로지 시체를 골라 그려오던 주제에, 뒤늦게 살아있는 사람을 그리고 있는 거야?   
  속을 갉아먹은 악독한 소리, 스스로 자아내었던 소리. 듣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는 형형색색으로 어우러진 팔레트, 구석구석에 짜여진 물감이 있었다. 왜일까, 스케치는 끝나지 않았어. 붓을 들었다. 각각에 놓인 물감을 한 자리에 섞었다. 물은 적시지 않았다. 애시당초 내게 물통 따위는 필요 없었다. 스케치는 완성을 져버린 채, 연필을 놓았다. 얼핏 보면 그와 닮아빠진, 살아있기에 아름답지 못했던 자화상. 얼룩덜룩, 먹구름과도 비스무리한 색깔의 붓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연필로 더러워진 도화지 위에 색을 채웠다. 얼굴은 회색, 어깨는 그레이, 상체는 천장 위로 떠도는 쥐색, 하체는 시멘트색, 색을 입혔다. 안타깝게도 신발은 그리지 않았다. 그리기도 전에 감정은 이미 끝을 도달했다. 오로지 완성을 바라는 그의 모습을 감정에 담고도 남았기에. 그러하기에, 나는 그의 바람대로. 염원을 이룬 것처럼, 새까맣게 물든 도화지를 그의 앞에 보여주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난 원래 손이 느리거든.”

  당신은 꽤나 급한 사람이네요. 넘쳐 흐르던 한마디를 끊어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 그런가보다. 스스로 납득하고 말았으니까. 그는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옅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꽤 괜찮지 않아요?”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이 검게 물들어진 자화상, 그것이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사실조차 실감하지 못한 채. 이게 당신의 모습이에요, 초조함에 썩힌 당신의 모습. 그저 기뻐하기 그지없는 그의 앞에, 나는 환히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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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토, 나는 말라갈 거야. 힘없이 죽어가는 산세베리아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주일 전에 들었던 그의 말 때문이었다. 장난이라 단정 짓기에는, 어느 때보다도 한 층 내려앉은 그의 얼글이 머릿속을 스쳤고, 거짓말이라 믿기에는 스스로가 이미 그의 운명을 실감했다. 나 홀로만이 그의 짧은 운명줄을 수긍하려 했다. 처음부터 그는 내게 있어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 고장난 시계와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러니 그가 뱉었던 한 마디를 외면 했었다. 그리고 허풍을 떨었다. 거짓말을 할 시간이 있다면, 당장 학교에 오라고. 전부 너 때문에 일이 바빠졌다고. 뱉었던 거짓말은 반환점이 되어, 다시금 내게로 돌아왔다. 아무도 모르는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과 비례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울부짖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고, 몸 속에 잠긴 모든 물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무서웠고, 괴로웠다. 가슴을 찌르고 들어온 그의 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이 무서웠다. 그가 무서웠다. 그의 죽음이 무서웠다. 그가 죽을 까봐, 당장 눈앞에서 사라질 까봐, 도망치기에는 너무도 늦어버렸다.
  도망치기도 전에 멋대로 들어온 사랑 따위는 내 안에 잠복하고 있었다. 마치 기회를 엿보던 스파이처럼.

   “케이토, 왜 울고 있어?”

   그렇게 너 또한 마찬가지로,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특히 어린 아이처럼 그이로 인해 소나기를 흩뿌릴 즈음이면, 언제나 그이는 나를 가로막았다. 그의 앞에 감정을 숨기기 힘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눈가를 비비고, 눈물로 흠뻑 젖은 안경을 옷깃으로 닦아내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가라앉은 고개를 억지로 올려 그를 바라보자 하면, 옅게 웃음을 머금은 그를 바라보면 볼수록,
  아니, 어차피 이런 몸이었으니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던 그의 한 마디에 덜컥, 흔들리는 창문처럼 왈칵, 하고 흘러넘치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수치였다. 남자, 라는 이름의 자존심은 한없이 떨어져, 그에게 닿아지려 했다. 그와 나만이 남겨진 병실, 지금이라면 모든 것을 내치고 달아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그만큼이나 무력했고, 그를 바라볼 수 있는 힘조차 남아있지 못했다. 허나 그는 괜시리 교복 바지를 구기던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곁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꽉, 꽉 잡아버렸다. 그리고 확, 잡아당겼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케이토.”

   네가 왜 울고 있는지. 심히 불편하고도 남는 자세였다. 확실한 건 내가 그의 품에 안겼고, 그는 아이 달래듯 제 등을 다독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편히 자고 일어난 그의 앞에서. 이상해. 이상하다고 느껴야만 했다. 너무도 갑작스럽기에, 당장 떼어내도 별 이상한 일이 아니라 믿었다. 그래, 떼어내야지. 어린애 취급은 누구보다도, 그에게 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좁은 등 위로 얹어진 손을 스을, 풀어내려 다른 한 손을 침대 시트 위에 얹었다. 그리고 바삐 그에게서 거리를 두려 타이밍을 노리려 했다. …왜일까, 그러기도 전에 풋, 조그마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는 그의 웃음 소리였다.

   “그래도, 너한테 이런 면도 다 있었구나.”  
  “괜찮아, 울어도 돼. 나는 괜찮으니까.”

   말을 이으며, 그는 나의 등을 조용히 다독여주었다. 곤히 잠든 아이를 다독이는 어머니처럼, 따스한 목소리로, 따스한 품을 등 져가며 나를 감싸 안았다. 갑작스레 고장난 선은 그의 등을 붙잡았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세게 붙잡았다. 그이로 인해 나의 모든 행동이 망가졌다. 그의 말에 잠깐 멈추었던 나의 눈물이 두루두루 그의 연푸른 옷을 적시고, 약품 섞인 그의 어지러운 향은 나를 목놓아 울렸다. 차음으로 그의 앞에 감정을 쏟아부었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이만의 애틋하고도, 따뜻하기 그지없는 온기가 울음 소리로 가득한 병실을 맴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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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은 언제나 평범하고, 언제부턴가 잊을 수 없는 피날레와 함께 매듭을 짓는다. 그렇게 생각한 건 사카타 긴토키의 죽음이 조그마한 땅을 울렸을 때일 터다.  
  그의 죽음은 허무했다. 허무함을 떠나, 텅 비어지듯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사카타 긴토키의 소식에 모든 사람들은 쏜살같이 달려왔다. 마치 대진표를 보기 위해 달려온 싸움꾼처럼, 한 치의 망설임조차 거둔 채 그에게로 걸음을 놀리지 않던가. 허나 이들이 달려오기 전, 상황은 이미 한계를 뛰어 넘었다. 죽기 전까지의 그는 한 마리의 들짐승과도 같았다. 고작 장난삼아 뱉어본 협박 하나에 그리 매달릴 줄은 어느 누가 알았으랴. 다시 그려보자니,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나의 협박은 아마 이러했을 거다.  
  ㅡ카부키쵸는 곧 하루사메의 서식지가 될 거야. 나는 기억했다. 사소하고, 시답잖다고 여긴 한 마디에 검을 붙잡고, 무섭게 달려들었다. 나를 밀어냈다. 마치 멧돼지 하나가 우람한 나무를 꺾으려는 듯, 자신의 터를 지키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의 모습을 부정했지만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라 과거를 되새기기에는 두 걸음이나 늦어졌다. 애당초 어리석은 것은 나였다. 나는 그를 죽였다. 사카타 긴토키는 나의 모든 것을 거부했다. 우스꽝스러운 이유는 나를 뒤집고, 숨을 조였다.  
  점차 그들의 통곡 앞에 등을 돌렸다. 도망쳤다, 고 해야 옳겠지. 평소와는 달리 그럴듯하게 나아가야 할 것을, 걸음은 뒤를 향했다. 그렇게 뒤로, 뒤로… 좁은 보폭이 어느 순간 그와의 거리처럼 넓어지고 말았다. 느릿한 걸음이 갈피를 잡지 못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뛰었다. 숨이 가빠지지 않았다. 그러니 지리조차 알 터가 없는, 사람이 살지 않는 어딘가로 달려가려 했다. 그의 죽음과 살인의 범인을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우고 싶었다. 허나 무작정 지우려 해도,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내부의 굴뚝의 검은 연기는 싫은 것들을 꺼내 올렸다. 그리고 높고 높은 파도처럼 나를 덮었다. 더이상 그 무엇도 나를 절망의 품으로 인도하려 손을 내밀었을 때, 그들을 제치고 나의 주변을 빙빙 맴도는 어지러운 것이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결코 장난 따위가 아니였다.

  ‘나는 너를 받아들일 수 없어.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야.’  
  ‘카무이, 유감스럽지만 남자와 남자는 이루어질 수 없어.’  
  ‘대신 하나만 약속할게.’

  만일 내가 너를 증오하게 되더라도, 내 흔적은 너를 찾아 붙잡을 거야. 반드시.
   연푸른 색과 하얀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나비. 이는 내게 인사를 하듯, 어지러이 제 주변을 허우적거렸다. 그야말로 사카타 긴토키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뱉었던 말의 의미는 착시현상(나비의 뒤를 따르는 오로라)처럼 보이는 환상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다시 한 번,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렸다.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범인은 양 손을 타고 진득하게 흐르는 붉은 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덧없는 자태를 뽐내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푸르고, 흰색을 띄운 호랑나비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괴롭고, 버거워서, 그라는 이름의 추억이 나의 몸을 억누르고 있었다. 정녕 저 나비가 그이라면, 거짓말이라며 들이닥친 현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아니라며 고개를 세게 저어야만 했다. 허나 푸르고, 뚜렷하지 못한 나비는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 피하지 않았다. 억지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듯이, 나와의 거리를 가까이 했다. 그리소 느릿하게 나의 눈동자 위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이전과 별 다를 것 없는 그의 모습처럼, 울지마. 라며 울보 취급하고, 어쩔 수없이 달래어주는 것처럼.

  “왜 나타난 거야?”

  울보 취급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나는 울보가 아니였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을 알려준 사람은 그이였다. 고작 쉴 새 없이 날갯짓을 보이며 눈엣가시로 보이는 작고 약한 생명체에게 위로 받고픈 목적은 아니란 말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허구로만 가득한 상황을 알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있는 총 지식을 동원해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고장난 로봇이 된 것처럼.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죽이고, 죽였던 로봇이 그를 만나 점점 망가지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더는 고칠 수 없을 불량품이 되었다. 심장이 북치듯 뛰어 오르고, 새로운 감정이라는 물건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을렁거리는 가슴에 쓰라리는 것은 아프다는 감정을 표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쌓여온 감정은 액체가 되어 눈동자에서 장맛비를 떨구고 있었다. 눈물이라는 것이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로봇은 괴로워했다. 바야흐로, 나는 그 괴로움에 버거워 떨군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어째서인지, 눈동자에 앉은 나비의 모습이 가려져야 할 것을, 훤히 드러나는 것처럼 비추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외면하려 하니, 어느덧 내 눈앞에는 하얀 오로라를 띄운 그의 모습이 눈을 마주하며 웃고 있었다. 환히 웃고 있는 얼굴은 내게 말해주었다. 거짓말이 아니야, 허구 따위가 아닌 그가 살아있을 때처럼.
  눈동자 위에 가라앉은 푸르고, 투명한 나비는 아무리 온 몸으로 실감하려 해도 실감할 수 없었다. 얇은 폭포처럼 내리는 내 눈물에 휩쓸려 간 것처럼, 푸르고 하얗게 조화를 이루던 나비는 어느덧 돌아올 수 없는 곳을 향해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환영마저 눈에 녹아 사그라지듯, 흔적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남은 것은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었던 환희, 그는 나를 버리지 않았어. 라는 망상에 버거운 웃음. 그리고,

  “아아, 이게 말로만 듣던 하루사메의 거물이던가? 토시.”  
  “아니죠, 곤도 씨. 하루사메의 거물은 너무 거창하잖아?”

  사카타 긴토키를 살해한 간 부은 괴물이지. 그가 웃던 자리에는 세상 모든 분노를 이끈 누군가가 있었다. 사뭇 다른 분위기의 그는 내게 검을 지켜 들었다. 드리우는 그림자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눈물과 함께 마지막을 가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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