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치. 어릴 때의 그는 언제나 나의 이름을 밥먹듯이 부르고는 했다. 특히 단 둘이서만 있을 때에는, 지겨울 정도로 부르기에 바빴었다. 처음은 왜? 라고 내게 답을 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아니 저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는 부끄럼쟁이나 새침데기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는 나의 이름을 부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딴청을 피웠다. 내 이름 한 번, 독서 한 번. 처음은 그이만의 장난이라 여기며 넘어 갔었다. 허나 이름을 부르는 횟수가 가면 갈수록 늘어나고, 이제는 다른 이들이 있는 앞에서도 모르는 척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어물쩡한 행동에 화가 났다. 라기 보다는 심술이 생겼다.
  그가 부리는 장난만큼, 나도 나만의 장난으로 대응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가 내 이름을 부르고, 곧장 외면하듯 마찬가지로 같은 방법으로 그를 골렸다. 케이토, 그의 이름을 부르다 반응이 오면 획 피해버리거나, 조금 나아가 아예 그이와 함께 있었던 장소를 벗어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분명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었다. 자칫 나의 장난이 그에게 상처를 입힐까 불안했고, 그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나, 싶어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의 장난이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처럼, 그의 눈치를 살피며 글씨와 글씨로 빽빽한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그에게 조용히 다가서려 했다. 허나 길고 긴 나의 장난을 멈추고 보니, 다시금 그는 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그에게 다른 대답을 꺼내보였다.

  “에이치.”
  “응, 말해.”

  또다시 모르는 척은 하지 말아줘. 재미라고 느꼈던 그의 장난은 어느덧 시덥잖게 느껴지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고, 모르는 척 외면하는 모든 행동은 그저 (나도 같은 나이지만) 어린 아이의 수줍음 때문이라 자각하고 싶었다.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쉬웠다면, 그에게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을 거다. 허나 나는 그리 단순하지 못했다. 아무리 솔직하지 못한 그이더라도, 감정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법이기에. 결국 그에게 화를 내었다. 정확히는 분노가 아닌, 짜증을 호소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와 나는 서로 눈을 마주했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었고, 나는 웃어보였다. 이윽고 나는 입을 열었다. 이제 한계야. 친구이기에 뱉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원래부터 조용했다. 그가 말을 늘어놓는 순간 상황은 급속히 바뀌겠지, 허나 지금은 아니였다. 쥐도 새도 잠든, 고요하디 고요한, 도둑이 들어와도 모를 기류가 주변을 겉돌았다. 그는 어찌나 놀랐던지, 안경조차 제 위치를 찾지 못해 이따금 삐뚤어져 있었다. 이상도 하지, 그리 놀라게 하던 말이었나. 되려 놀란 쪽은 내 쪽이었다. 겉으로 튀어나오는 의문을 넣은 채, 그의 기울어진 안경을 올려주기 위해 손을 올렸다. 나의 손은 그의 안경을 잡았다. 그렇게 살짝 올려주려 하니, 그가 애매한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나, 나… 에이치를 지킬 거…다.”

  평소와는 다른 어색한 말투, 죽을 것 같이 파르르 떠는 입술. 동작이 멈추었다. 그는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고, 나마저 그와 함께 시간이 멈추듯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마치 어느 누군가가 초능력을 사용한 것처럼, 우리는 행동을 멈추었다. 수없이 부푸는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애당초 그가 뱉은 지킨다, 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급히 설명하려 한들, 나는 영원히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는 멈추어진 시간을 부수고, 확 붉어진 얼굴로 허둥지둥 자신의 말을 이해시키려 했다. 내 몸을 걱정해서 했던 말이라며, 전부 잊어버리라며, 괜한 오해는 말라는 둥의 말을 늘이며 안경 위에 얹었던 제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더니,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허나 이것이 오해라 불려야 한다면,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으로 채워진 나의 표정은 결코 아니리라 단정 지을거다.

  “정말, 정말이야?”
  “그렇다면 케이토는 내 하나뿐인 기사인거네?”  
  “내가 오해라고 했…… 하아, 그래. 맹세하지.”

  소용없는 짓이야, 라며 너를 밀어내기엔,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아도, 조금이나마 그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가볍게 떠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구름처럼 두둥실 뜨는 기분을 이어받은 스킨십. 허나 분명 놀라 도망칠 것 같았던 그는 웃으며 제 손을 맞잡아주었다.

  “이건 케이토와의 맹세의 증표.” 
  “생각보다 단순하네.”  
  “혹시 다른 걸 원하는 거야?”
  “…설마.”

  우리들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앞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약속임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발버둥치리라. 텅 빈 허공, 도무지 닿지 않는 하늘에게 맹세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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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와의 연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에 대해 누군가가 묻는다면 당연하다는 듯이 환히 웃으며, 아주 멀고 먼 옛적부터요. 라 대답할 것이고, 아무리 누군가가 나의 대답을 농담으로 받아친다면, 저마저 곧이 곧대로 받아칠 것이다. 정말,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제 앞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일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안정을 취하라며 억지로 눕히려는 그이에게 입을 열어본다. 반겨주면 안되는 거야? 케이토.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는 그의 행동은 받아들이고 파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일까, 그것은 당연한 나머지 기가 찬 질문이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러한 질문에 시답잖은 답을 꺼내고 만다. 거리감, 그와 나에게서 느껴지는 거리감. 그것이 어쩌다, 일지 일부로, 일지 모르는 괴리감이 나를 맴돌았다. 억지로 앞을 향해 나아가려 해도, 친구라는 이름의 가시 덩굴은 나를 찌르려 했다. 그가 스스로 자아내는 관계의 선은 제 몸을 감싸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를 조였다. 이윽고 내게서 멀어지려 했다. 공교롭게도, 그는 나를 밀어내려 했던 거다. …아아, 당연하지. 하스미 케이토는 너를 단지 ‘친구’사이로만 바라보고 있는 걸. 마음에 품고 사는 또다른 제 소리가 맴도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나는.

  “케이토.”
  “아까 말했잖아, 너는 아직…”

  나, 이제 그만하고 싶어. 손을 놓아버리기에는 그가 단순한 친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인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감정을 머금었다. 줄곧 감싸던 감정을 안고, 진심을 내뱉으려 그에게 다가갔을 때는 모든 것이 한 발짝 늦어졌을 뿐이었다. 그는 이미 사람과 사람에 대한 관계에 선 하나를 긋기 시작했고, 그렇게 후회를 반복하기에 바빴다. 한참을 망설이던 자신을 후회했다. 증오하려 했다. 허나 놓으면 놓을수록 그는 다시금 나를 잡아주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이어진 그의 버릇임을 알면서도, 그를 잡고, 결코 놓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의 손이 나락으로 밀어낸다 하더라도.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제 말에 의문을 품었는지, 머리 주변으로 물음표가 두둥실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무렴,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는 이상, 절대 모를 터다. 그러니 능글거리던 표정을 잠재웠다. 허나 조용히 눈을 감고, 다시 떠보이니 그의 뚱한 얼굴에 풋, 하고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이이기에,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그렇게 얼굴만 찡그리면 금방 늙어버린다?”
  “지금 남을 챙길 때가 아니잖아, 에이치.”
  “케이토.”

  좋아하고 있었어. 그동안 감추었던 말은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연스레 흘러간 말은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 오랫동안 그여진 그의 선을 끊어내려 했다. 이것이 처음이자 끝임을 각오한 채, 가늘게 떠는 손으로 무의미한 이불 자락을 꽉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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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ar. 하스미 케이토

   안녕, 지금쯤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즈음에 나는 이미 네 곁이 아닌 커다란 병원에서 호리호리한 껍데기를 누군가들이 옮겨가고 있을 거야. 분명 나는 눈을 감고 있을테고, 너는 이미 병실에서 빠져나와 네가 있어야 할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겠지. 아아, 그렇다고 해서 이 쪽으로 다시 돌아오지 말아줘. 너에게는 내 모든 모습이 같을 지라도, 지금의 나를 네게 보인다면 창피해서 너를 반기지 못할 것 같아. 그러니 너는 부디 앞을 향해 걸어줘. 무엇이 제일 소중한 지를 생각해줬으면 해. 아무래도 그것만을 바래야, 나아가는 너의 곁에서 손을 떼어낼 수 있을 것만 같으니까.

  …있잖아, 케이토. 나는 이 편지를 멈추고 싶지 않아. 그저 백지 위에 글씨를 써내려가는 것 뿐인데도, 이 편지에서 손을 놓고 싶지 않아. 설령 엉망진창에 제멋대로의 모든 감정을 실어 자아낸 어설픈 편지더라도, 너를 생각하면 나는, ……미안해. 감정이 격해져버렸어. 글씨도 삐뚤어졌어. 이럴 때 네가 내 옆에 있다면, 에이치! 글씨가 이게 뭐냐! 라던가, 틀림없이 나를 구제불능이라 하면서 네가 대신 내 옆에 앉아 너의 글씨를 덧붙였을 거야. 일상생활은 물론이요, 학생회 일을 할 때나 마찬가지로 너는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보좌해주었어. 돌봐주었어. 꼭 선반 위에 닿지 않은 책을 대신하여 잡아주듯이, 너는 상냥하고, 툴툴거리면서도 무엇이든지 해주는 영웅과도 같았어. 그래, 나는 너를 동경하고 있었을 지도 몰라.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너의 모습을 부러워했고, 주변 이들의 신뢰를 사로잡는 너를 질투했었어. 그래서 시도때도 없이 나는 너에게 말했었어. 부럽네, 케이토. 기분이 어때?

  하고 싶었던 말은 언제나 햇빛이 구름에 가려지듯 틈새를 내어주지 않아. 흘러가는 구름에 바뀐 잿빛 풍경은 나를 둘러싸고, 햇빛을 대신하여 내어주는 소나기는 나를 괴로이 만들어버려. 그리고 말하게 돼. 그동안 너에게 쌓여온 감정, 모순적인 말투, 풍선처럼 부푸는 자기혐오. 너라는 이유로 나는 한 번, 너를 괴롭히려 했어.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네가 미더워 이질적인 복수를 시도하려 했어. 하지만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다시 돌아가자며 마이 페이스를 되찾았을 때는 너무도 늦어버렸어. 왜냐하면, 입술과 입술 사이로 드리우는 타액은 억지로 서로를 알아가려 했고, 너의 상체는 이미 새빨간 자국이란 이름의 나를 채워가고 있었으니까. 그 때의 너는 울고 있었어. 부탁이니까 하지말아줘. 에이치, 에이치. 손을 뻗어 제 등을 붙잡고, 상기된 얼굴로 싫다며 나를 밀어내었어. 분명 내가 멈추었다면 나는 말했었겠지. 미안해, 너의 이름을 부르며 상황을 원 위치로 되돌려놓겠지. 하지만, …미안해, 그 뒤는 기억할 수 없어. 기억이 나지 않아. 미안해, …미안했어. 진심이니까.

  이 때 와서 보니 너에게 말하지 못한 말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 아마 마지막, 이라 그런 거려나. 아아, 화내지 말아줘. 분명 우리는 약속 했었지? 절대 마지막, 은 꺼내지 말자고. 어릴 때의 약속이니까, 너는 기억하려나? 그런데도 말할 수밖에 없었어. 정말, 이것이 마지막이야, 케이토. 처음이 있으면 마지막도 있는 거야. 그것이 한참이나 빠른 마지막이라는 게 문제지만 말야.

  케이토, 너는 들리지 않겠지만, 병실 너머로 소리가 들려오고 있어. 나는 이 소리를 알아. 당연하게도, 간호사들이 카트를 끌고 걸어오는 소리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이끌려 가야만 해. 나는 하고 싶지 않다며 말했는데도, 이것이 나를 기적이라 끌고 갈 일이라며 오히려 기뻐하고 있어. 아니, 늘 그렇듯이 나를 폐롭히고 말아. 그럼에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쩌지, 케이토. 나,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나는 줄곧 생각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 끝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을. 운이 좋은 사람에게는 염원을 얹어주겠지만, 운이 없으면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아. 케이토, 나는 어느 쪽일까? 어째서 나는 너와 같은 운명이 아닌 걸까? 왜 사람은 같은 길을 걷는다 해도, 굳이 두 갈래,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야만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 케이토,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 못해본 것들이 잔뜩 널려있어. 케이토 나는. 나는, 살고 싶어. 한 번도 믿어본 적 없는 신께서 내게 살아갈 기회를 준다면 나는 그 신을 영원히 찬양할 수 있을 것만 같았어. 그리고 뒤돌아보니 겨우 깨닫고 말았어. 아니, 언제부턴가 바라고 있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어. 그리고 이리 말해보고 말아.

  케이토, 훗날부터 간절히 소원했던 신이 너였으면 했었어.

 

 

 

  결말은 찾을 수 없었다. 세 장이나 넘어선 그의 편지를 받았을 때는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고, 그의 손떼 묻은 편지 한 장조차 모조리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적셔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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