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여왕이 어렸을 때, 시계탑 앞에서 한번 부딪힌 적이 있었다. 여왕이 머리를 심하게 다친건지 내 앞에서 크게 울자, 나는 울고있는 여왕을 무시하고 일어서서 발길을 돌릴려고 하자 여왕이 내 옷깃을 붙잡더니 울먹이면서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지…마.'
이것이 어린 여왕과의 첫 만남이였다. 어느샌가 여왕과 우연스레 만나면서 인연을 쌓게 되었고, 이상하게도 그녀와 마음도 척척 잘맞았으며 신기하게도 여왕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도 잘 알고있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여왕은 내게 '다시마초절임' 이라는 것에 대해 알려주며 한번 먹어보라고 건네준다. 꽤나 시큼하면서도 달달한게 다시마초절임의 특징이였다.
여왕과 내가 같이 다닐 때 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수근거린다. 무슨 일인지 몰라서 사람들을 무시하고 여왕을 바라보며 즐거운 얘기를 해주고 있었을 때, 누군가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저 녀석, 어째서 카부키쵸 여왕과 어울리고 있냐…, 백성이 높은 신분과 마주쳐도 되는 거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내 옆에서 다시마초절임을 먹고 있는 그녀, 이 사람은 카부키쵸의 여왕인 카구라 라는 것을. 그걸 알게되자 나는 여왕의 부하들에게 잡혀갔고, 그곳에서 여왕의 오빠라 불리는 '카무이' 라는 녀석과 만나게 되었다. 카무이는 에도 전체를 통치하고 있다한다. 카구라는 동생이기에 이 카부키쵸 안을 관리하고, 그들의 아버지는 우주를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고있다며 카무이가 내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카무이는 잡혀온 내게 마지막으로 작은 부탁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못난 동생을 지켜줘.'
그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여왕을 지키겠다는 멩세를 몇번이고 반복했다.
기필코 내가 '악' 이 되어서라도 카부키쵸의 여왕, 나만의 여린 여왕 카구라를 지키겠다고.
그 후로 나는 힘을 갈고닦아 16살이 된 지금, 여왕의 정식 부하로 항상 여왕의 옆에서 카부키쵸의 상황을 보고하며 잡일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되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여왕의 다시마초절임을 갖다주는 역할도 추가. 항상 3시를 가르키는 교회 종소리가 세번 울리면 재깍 여왕에게 큰 그릇에 다시마초절임을 하나 담아서 가지고 와야한다. 덜렁 하나라서 설거지 할 걱정 없겠다, 엄청 깨끗하다. 다시마초절임을 입에 물고있는 여왕한테 시비를 걸면 또다시 말싸움이 시작되고 만다. 나도, 여왕도 그 말싸움을 웃으면서 즐기고는 했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여왕을 위해 부하가 된 건 전부 물거품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는 척, 하는건지 계속 장난스럽게 나를 부려먹는다. 그럴때마다 가끔 '이런 미친여왕' 라고 여왕의 앞에서 중얼거렸다가 짤려나갈 뻔했다. 자르겠다는 말만 하지 실제로는 자르지 않았다. 여왕에게 죄송하다, 잘못했다고 빌빌거린 적도 없다. 왜냐면 나보다 2살어린 사람한테 존댓말 쓰기도 싫었고, 말만 번지르르하지 머리가 텅비어있는 여왕은 보면 볼수록 은근 괴롭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롭히기도 전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으리라.
카부키쵸의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을 일으킨 자는 신센구미와 양이지사였다. 사실은 다 알고있었다. 신센구미는 계속 여왕의 밑에서 일하기 싫다며 내팽겨쳤고, 양이지사는 애초부터 여왕을 박살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목적으로 폭탄테러를 하고있었으니까. 아무래도 그 둘이 손을 맞잡고 혁명을 일으켰나보다.
2년 전, 한때 신센구미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여왕을 지키기 위해. 대원들이 내 힘을 보고 감탄하며 나를 따르겠다고 뒤에서 졸졸 따라다녔다. 그래봤자 귀찮은 녀석들이였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친화력으로 똘똘 뭉쳐져있는 종이더미와도 같았다. 그리고 부장인 히지가타 토시로 와 국장인 콘도 이사오는 신센구미의 자랑스러운 별이라고도 불렸다. 콘도 씨는 내 고민을 잘 들어주었으며 다른대원들보다 혼자 있던 내게 손을 뻗어준 유일한 구세주같은 사람이였고, 히지가타 씨는… 그냥 히지가타 씨였다. 식성이 약간 보기가 싫었지만 참아야 했다는게 열받았다.
그렇게 친목을 다져오던 신센구미가, 그동안 좋아해왔던 신센구미가 양이지사를 쫓아가야만 하는데 되려 손을 잡았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신센구미와 양이지사는 여왕의 목을 노리고있고, 여왕의 대한 불만이 있던 시민들도 한두명씩 그들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왕님, 어서 도망치십시오!!"
"무슨 일이냐, 해?"
"야, 혁명 일어났다잖아 빌어먹을 여왕아."
"뭣… 아니 여왕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해! 죽을 부하."
"둘이 싸우지마시고, 얼른 도망치시라깐요!!"
"싫다 해, 차라리 죽을거면 이 빌어먹을 하인하고 죽을거다 해."
"입다무세요, 여왕 죽으면 나야좋지만 나도 지옥행이야."
"아아아아아ㅡ!!!! 몰라요!! 저, 저부터 나갈테니까 소고씨가 여왕님 데리고 뒷쪽으로 도망쳐나오세요!!!"
다급해진 신파치가 얼버부리며 소리치더니 금방 나가버렸다. 혁명이 일어난 지금 여왕과 나, 둘만 남고 다들 도망가버렸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기회가 있으리라. 한쪽으로는 여왕과 같이 뒤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도망쳐도 시간이 없다. 창문을 슬쩍 바라보자 카부키쵸의 기사단이 전부 점멸되어 있었고, 내부에서 칼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가 여기까지 울려퍼지고 있었다. 여왕도 그 소리를 들은건지 내 옷깃을 꽉 잡고 울먹인다. 옛날처럼, 울것만 같았다.
결국 고심의 끝에 내가 결정한 건 하나밖에 없었다.
"여왕, 숨바꼭질…할래?"
"지금 그럴 시간이 아니잖냐! 이 썩을부하!!"
"아니, 하자. 마지막으로… 내가 여왕 옷장에서 네 옷을 입을게. 여왕은 이 망토를 걸치고 당장 도망쳐, 지금 당장."
"그게 무슨 술래잡기냐고!! 멍청아, 그렇게는 못한다 해! 죽을거면 나와 같이…!!"
"약속, 했잖아요?"
무슨수가 있어서라도 나는 반드시 여왕을 지켜주겠다고.
서로 등지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나는 입던 옷에 여왕의 드레스를 껴입고, 여왕은 자신이 입던 드레스를 벗어던지자 또다른 편안한 복장이 따로 있었다. 전에 여왕이 그랬었다. 자신은 이런 촌스런 드레스를 입어도 안에는 내복을 입고다닌다, 고. 그 내복이 반팔에 반바지인가보다. 여왕은 내복 위에 망토를 걸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서는 약간 비웃다 싶더니 조금 울먹이는듯한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술래는… 나다 해, 10초 셀거다…? 이 바보…소고."
여왕은 눈물이 흐르는걸 손으로 막고 도망쳤다. 계단은 두개였다. 하나는 흔히 쓰는 계단과 또 다른 하나는 계속 잠궈놓았던 비상용 계단. 지금은 긴급상황이였기에 모두 비상용 계단을 사용했다. 여왕이 잘 도망쳤나 싶어 둘러보다가 나는 드레스를 들쳐올려 손을 바지주머니에 갖다대며 그와 동시에 약을 꺼내들었다.
'환각제',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약이라며 겐가이 할아범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신뢰하고 이 약을 받아왔다. 그가 말하길, 이건 꼭 위험하거나 중요한 상황이 써야한다고. 그런얘기는 다 필요없었다. 재빨리 약을 입에넣어 삼켰다. 효과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라 몇번은 마음속으로 되뇌이자 빌어먹을 순간에 그들이 내가 있는곳까지 들이닥쳐왔다.
'여왕, 드디어 너의 목을 벨때가 왔다!!' 내가 생각한 구세주는 지금보니 전혀 달랐다. 정들었던 상냥한 모습은 어디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대신 나를 향해 달려들것만같은 살기가 지속되고 있었다. 히지가타 씨는 처음 봤을때부터 살기가 돋구고 있었지만, 입에 담배를 물며 안정을 취하는 것 같은 얼굴이였다. 콘도 씨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자 양이지사 녀석들이 나의 양 팔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간다. 끌고가는 도중에도 콘도 씨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구세주라 생각했던 그가 한순간에 악마로 변하는 순간, 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환각제가 제대로 먹힌 대신에, 모두의 살기의 표적은 '여왕'의 가면을 뒤집어 씌운 나였다.
*
"모든 시민들이여, 이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때가 온것이다! 그동안 우리를 개취급하며, 죄없는 우리들에게 돈을 뜯어내고, 사사키 공의 후손들까지 모두 불태워 없앤 이 카부키쵸의 악의 여왕. 카구라를 처형하겠다!!"
한발한발 내딛을 때 마다 민중들의 환호소리가 들린다. 내 스스로 팔을 걸치고 목을 판자 안에다 넣어야한다는 게 꽤나 굴욕적이였다. 내 목 위에는 커다랗고 날카로운 쇳덩어리가 내 긴장감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나무판자에 목을 내자 민중들이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나를 여왕이라 착각하고 비난하며, 도발시킬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다름아닌 히지가타 씨였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들킨건가, 싶어 눈을 질끈 감다가 다시 떠보자 히지가타씨의 시선은 다른곳으로 향해있었다.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거슬리게 만든다. 평소같으면 여왕한테 저 처형대를 부수든 뭐하라든 건의할텐데. 내가 따르는 여왕은 이미 내 옆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3시, 교회종이 세번 울리는 순간 쇳덩어리가 내 목을 칠 것이다. 그때까지 여왕이 한시라도 빨리 도망쳤으면 하는 바램이다.
분명, 도망갔으리라 생각한다. 분명…, 분명.
"잠깐, 질문."
분노하는 민중들 사이에서 히지가타 씨가 콘도 씨 앞에서 손을 번쩍 들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와의 거리는 꽤나 멀었기에 큰 소리로 말을 주고받아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히지가타 씨의 그 낮은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해졌기에 작게 말해도 내 귀까지 잘 들려올것만 같았다. 그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어 불을 붙이고 입에 갖다댔다. 여기까지 그의 담배연기를 내뿜는다한들 냄새는 이쪽까지 닿지 못하고 금방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한순간에 조용해진 분위기를, 히지가타 씨가 깨뜨리고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너… 나하고 어디서 본 적 있냐?"
그의 표정은 전에 봤던 것보다 한층 더 진지해져 있었다. 질문을 듣자 더욱 더 분노한 민중들이 그에게 소리치기 시작한다. 여왕에게서 온 첩자가 아니냐며, 무슨 사이이냐며 여기저기서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민중들은 하나같이 미쳐있었다. 히지가타씨의 질문 하나로, 먹잇감 하나로 싸우는 하이에나들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히지가타씨의 눈은 나를 뚜렷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 술래잡기가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무덤덤하게 대답없이 히지가타 씨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포기했다는듯이 시선을 돌리고 담배를 땅에 내던지며 발로 밟아 비볐다.
"이제 작별이다! 카부키쵸의 악의 여왕.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라도 있는건가?"
콘도 씨가 사악하게 웃으며, 모두가 나를 비웃으며 그저 내가 죽기를 빨리 바라고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이 무섭고도 두려워지는 기분을 여왕이 느끼지 못해서 다행이라는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또 쉬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내 목소리를 들으면 모두 내가 여왕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고 만다. 더군다나 히지가타 씨도 그런 질문을 할 정도라면 어느정도 눈치 챈 모양이였고.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모르겠다. 단지 잠겨두었던 생각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모든걸 다 내팽겨치고 여왕과 단 둘이서 도망쳤다면 어땠을까.
나는 정말 여왕을 지켜주는 걸까, 나는 '선'인가, '악'인가.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여왕한테 전해지면 어떻게 될까.
여왕은 나를 좋아하고 있을까, 여왕은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나는 여왕을 사랑하는데, 좋아하는데. 계속 가슴속에 쓰레기더미처럼 묻어놓으면서까지 여왕을 짝사랑해왔는데. 너는 알고 있는걸까?
나는 잘 모르겠어, 네가 왜 모두에게 '악의 딸' 이라 불릴정도로 사악했는지.
여왕과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처음 내가 여왕의 옆에서 일하게 된일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이 점점 잊혀져간다. 마음 한켠이 따뜻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하늘을 쳐다보자 한참 전에 하늘로 떠나신 누님의 얼굴이 뭉실뭉실하게 구름이되어 비춰진다. 여왕이 처형대에 올려놓은 모든 민중들은 나와 다른 생각이겠지, 모두 억울해하며 목을 내놓았으니까.
'이거는 다시마초절임이라고 하는거다 해! 내가 먹어본 것들 중에 가장 맛있는거라 생각해!'
'흐응, 그게 맛있는거야?'
'당연하지! 이 카구라님을 믿으면 된다 해! 그럼 엄청 맛있을테니까!'
'나중에 먹어볼게.'
댕, 댕, 댕ㅡ. 교회 종소리가 마지막을 고한다.
'지금당장 다시마초절임을 가져와라 해! 여왕은 지금 몹시 배고프다 해!'
'누가 배고프다고 다시마초절임을 드신답니까? 네네, 알겠습니다.'
"오늘 간식도 다시마초절임 입니다."
너는 여왕, 나는 하인.
운명이 갈라진 불쌍한 우리들.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악이라도 되어 보이겠어.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때는 실컷 놀아보자. 여왕.'